전쟁으로부터의 발자취전쟁 체험자 전시/전후 증언 영상

미국에서의 포로수용소 생활과 나의 전쟁 후 생활

아사토 쇼토쿠 씨

생년:1930 년

출신지:페루

전쟁 전의 학교 생활

 저는 페루 공화국의 리마 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페루의 일본인 초등학교에 반년 동안 다녔죠.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이었어요. 그 후에 기샤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당시의 나카구스쿠촌립 기샤바(진조) 초등학교죠. 그리고 3학년 중반부터 현재 슈리의 조사이 초등학교, 당시의 슈리 제2(진조)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그 후 1943년에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현재의 슈리고등학교)에 입학했지요.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의 수업에서는, 1학년때부터 학생들은 어차피 군인이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인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학도병으로 부대 배속

 (1945년)3월 28일, 친구와 함께 (슈리)한타 강의 통신대 본부로 갔어요. 제가 소속된 반은 제5중대라는 통보를 받고 그 부대에 입대했지요. 입대할 때 군복이 지급되었어요. 사복은 보자기에 싸서 보관했고, 받은 군복을 입고 육군 군화를 신은 후 육군 이등병 계급장을 옷깃에 달았지요. (진지는)자연 생성된 벙커였고, 거기에 들어갔어요. 제가 소속된 반은 군인이 8~9명, 저와 같은 학생들이 4명이었죠. 일은 4명이 2개 조로 나뉘어 24시간 교대제로 근무했어요. 어떤 임무였느냐 하면, 우리 반은 이에지마에 있는 부대와의 교신이 주요 임무였지요. 그리고 학도병의 주된 업무는 송신에 사용하는 발전기의 크랭크 돌리기였어요. 식사 시간의 배식이나 식사 후의 설거지, 통신문을 사령부로 전달하는 전령 업무, 그런 것들이었죠.
 그런데 4월 하순에 이에지마의 부대가 함락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중대 본부로 철수해 거기서 일하게 되었어요. 중대 본부에서 학도병의 주된 업무는 식사 시간의 배식이나 마을까지 가서 물을 긷고 4시간 교대의 보초, 보초 일은 벙커 꼭대기 20~30m 위쪽에 받침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망을 보는 거였죠. 물론 당장 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방위를 위해서는)보초를 서야만 했어요.

슈리에서 시마지리로 철수

 (그 후)시마지리로 철수하게 되었어요. 미군이 근처까지 공격해 왔기 때문이죠. 슈리의 관음당 근처에서도 미군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요. 5월 27일에 급히 시마지리 마부니로 철수했습니다. 제 동급생 학도병 2명, 그리고 군인 2명. 전부 4명이 부상병을 짊어졌어요. 사복을 등에 멘 채로 부상병을 업었죠. 철수를 시작할 무렵부터 폭우가 내렸어요. 5월 27일은 마침 장마철이라, 벙커에서 나왔더니 폭우 때문에 온통 진흙탕인 상태였지요. 당시는 아스팔트 같은 게 없었으니까요.
 하에바루를 지나 고친다로 들어갔더니, 주민들도 남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더군요. 수백, 수천 명의 군중이 시마시리로 대피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서 사람의 모습도 보이게 되었을 무렵, 주위를 보니 전사자의 시신이 길바닥에 널려 있었어요. 개중에는 남쪽을 향해 기어가는 생존자도 있었죠. 진흙탕 속을 기어가는 모습은 정말로 비참한 광경이었어요. 또 개중에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밟지 말라고 외치는 부상병도 있었고요. 이토만 마부니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는데, 제5중대의 선발대가 그곳을 확보했기 때문에 거기로 갔습니다.

마부니 벙커에서의 생활

 그곳에 처음 도착한 학도병의 말에 따르면, 거기는 원래 주민들이 지내던 벙커였는데 군의 명령으로 (주민을)쫓아냈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주민들은 냄비와 솥을 들고 매우 슬픈 얼굴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주민들을 몰아내다니, 어처구니없는 만행을 저질렀죠. 결국 우리 제5중대는 주민들을 몰아내고 벙커에 들어갔기 때문에 총원 35명 중 전사자는 11명이었습니다. (그에 비해)다른 부대인 제6중대는 주민들의 벙커를 뺏지 않았어요. 큰 암벽을 등진 장소에서 버티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6중대는 34명 중 28명이 전사했죠. 벙커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28명이 전사했고 6명이 살아남았는데, 6명 중 4명은 부상자라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은 2명뿐이었어요. 그만큼 벙커를 뺏은 것과 뺏지 않았던 것이 적의 포화에 노출될 (위험성의)차이가 컸던 것 같아요.

학도병 해산

 그리고 6월 20일이 되어, 적이 마부니의 마을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에 학도병은 해산하기로 하고 전원 소집되어서 “이제 적은 코앞까지 왔으니 중대를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중대를 해산한다. 학도병 제군들, 고생 많았다. 구니가미의 우도 부대는 건재하다고 하니, 제군들은 전선을 돌파해 우도 부대와 합류해서 싸우길 바란다. 혹시 거기까지 갈 수 없다면, 마부니 해안에 일본의 잠수함이 구조하러 온다는 정보도 있으니 마부니에서 기다려도 좋다. 어떻게 행동할지는 스스로 판단하도록” 그런 명령과 함께 학도대는 해산되었어요.
 (우리 학생들은)배를 채운 후 해가 지면 전선을 돌파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다른 부대의 하사관이 우리를 찾아왔지 뭡니까. (그 하사관은)우리한테 포로가 되라고 권유했어요. 미군 비행기에서 전단을 뿌렸는데, 일본군은 손을 들고 포로가 되라는 내용의 일본어 전단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죠. 하사관의 말에 따르면 그 전단은 진짜라고 했어요. 전쟁 포로 학대를 금지하는 ‘헤이그 조약’이라는 국제 조약이 있는데, (하사관이 이어서 말하기를)“미국은 헤이그 조약을 지킬 거야. 학대당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포로가 되거라.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질 거고,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지만 패망한 후에 새로운 일본을 재건해야만 해. 그러기 위해 너희 같은 청소년들이 일어서야만 하고. 게다가 너희들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죽지 말고 포로가 되어라”라고 권유했지요.
 그래서 우리 3명은 다음날 낮에 손을 들고 마부니의 구릉지로 올라갔어요. 마부니의 공동 우물을 지나 올라가다 보니, 미군이 10명 정도 있었기에 손을 들고 항복해 포로가 되었죠.

포로가 되어 야카의 포로수용소로

 주머니를 모두 뒤져 무기가 없는지 확인한 후, 트럭에 실려 지넨 방면으로 연행되었어요. (거기서)트럭을 세우고 7~8명 정도의 포로를 더 태워서 야카 포로수용소로 갔지요. 그곳은 3개의 캠프로 나뉘어 있었어요. 일본군(본토 출신), 오키나와 출신 군인과 군무원, 그리고 한국인, 그렇게 3개 캠프로 나뉘어 있었죠. 캠프에는 ‘K-레이션’이라는 게 있었는데, 기름종이로 포장된 미군의 전투식량이었죠. 비스킷과 작은 통조림 등의 배급품을 먹었어요. 미군은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싸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는 굶주림에 허덕였는데 말이에요. 전쟁에 대한 준비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죠.

배를 타고 하와이로

 (7월의)어느 날, 오키나와 출신 포로들만 소집되었고 (일본계 2세)하와이 출신 미군이 이름을 부르더군요. 호명된 사람은 트럭에 타라고 했고, 저도 트럭에 탄 채 차탄의 해안으로 끌려갔어요. 거기서 배에 태우길래 저는 분명 미군은 우리를 노예로 삼기 위해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죠. 하와이라든가 미국 본토에 간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어쩌면 남쪽에 있는 섬으로 끌려가서
노예처럼 일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했고요. 배가 출항하자 갑판에서 점점 작아지는 오키나와 본섬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어요.
 배에서 나오는 식사는 양이 매우 적었죠. 미국식의 작은 그릇에 절반쯤 담긴 밀가루와 감자, 당근에 케첩으로 간을 한 그런 음식이 하루에 두 번 나왔어요. 우리가 탄 배는 군인 수송선이었고, 잠자는 곳은 기둥으로 나뉜 간이 침대가 4단 있었는데, 거기서 잠을 잤지요. 그 배에서는 바지 한 벌과 소매 달린 티셔츠 한 장으로만 생활해야 했어요. 그게 더러워지면 빨아 입어야 했는데, 마를 때까지는 발가벗은 채로 지냈죠.

하와이에서의 포로수용소 생활

 (하와이 수용소의)식사는 아주 잘 나왔어요. 이에지마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는데, 취사 담당으로 일하고 있더군요. 미군용의 둥근 식기가 있었는데, 거기에 밥을 가득 담아 줬어요. 더 달라고 하면 바로 퍼 줬죠.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게다가 흰쌀밥이었죠.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된 후 먹어 본 적이 없을 만큼 맛있는 흰쌀밥이었어요. 하와이로 온 포로들은 모두 깜짝 놀랐지요. 이렇게 맛있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포로수용소 생활

 8월 초순 무렵 (미국 서해안)샌프란시스코는 쌀쌀해서, 아마 한류의 영향
때문인 것 같은데, 밤에는 히터를 켜고 잤어요. 공기가 상쾌해서 살기 좋은 곳이었죠. 거기는 사이판 쪽에서 포로가 된 일본 해군들도 있었어요. 나중에 그들은 텍사스 주로 이송되었죠. 당시의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분리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위스콘신 주와 텍사스 주 각각의 포로수용소에서 오키나와 출신 포로는 (샌프란시스코의 수용소로)이송되었어요. 거기서 오키나와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텍사스 주에서 온 14~15명 정도의 포로들은 다들 너덜너덜한 옷차림에 신발도 찢어져 있었어요. 피부도 검게 탔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엄청난 중노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큰 나무를 베거나, 자른 나무를 짊어지는 등 그런 중노동을 시켰다고 했어요. 위스콘신 주에서 온 포로들은 미국의 일본계 2세 부대처럼 차림새가 깔끔했어요. 복장이나 신발도 깨끗했죠. 머리기름(포마드)까지 바르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위스콘신의 수용소는)식사도 맛있었다고 하더군요. 일당 25센트의 임금도 받을 수 있어서 그걸로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있었다고 했어요. 위스콘신 주의 포로수용소는 그랬다더군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배에서도 대우가 각각 달랐죠. 미국 본토 포로수용소의 대우도 제각기 달랐고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국가 기준이라는 게 없고, 배든 수용소든 만사가 각 책임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오키나와로 귀환

 (1945년 11월 무렵)저는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왔는데, 당시 우리 가족은 구시가와촌(현재의 우루마시)에 있는 시오야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어도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나카구스쿠촌은 새로운 행정구역인 고자(현재의 오키나와시) 지구 관할이었기 때문에 고자 지구로 가면 된다고, 포로수용소에서 그렇게 들었어요.
 저는 가족이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 3명이서 오키나와시 아게타에서 공동 생활을 했죠. 그중 한 명은 필리핀에서 포로가 된 사람, 다른 한 명은 사이판에서 포로가 된 사람,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서로 도우며 살았어요.
 그 후에 우리 어머니가,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게타에 있다는 걸 알고 찾으러 왔어요. 우리 가족은 구시가와에 수용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구시가와까지 걸어갔지요. 우연히 제게 입대를 권유했던 동급생과 재회했어요. 이미 귀환해서 근처에 살고 있다더군요. 그 녀석은 포로가 되지 않았는데, 마부니에서 주민으로 변장해 있다가 4, 5일 뒤에 구시가와로 돌아온 거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구시가와에)‘마에하라 하이스쿨’이라는 학교가 생긴 것과, 그 녀석도 그 학교에 편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저한테도 거기 편입하라고 하더군요.

종전 후의 학교 생활

 마에하라 ‘하이스쿨’. 그때는 고등학교라고 안 했죠. 마에하라 하이스쿨이 다카에스 초등학교 교정에 생겨서 거기에 입학하기로 했는데, 당시의 학교 건물은 천막이었어요. 맨땅에서 공부했고 책상과 걸상도 조잡한 데다 칠판도 없었죠. 저는 개교한 지 열흘 정도 후에 입학했어요. 교과서도 없었고, 그냥 선생님 이야기를 듣기만 했죠. 미군을 위한 교육 시설이 있었어요. 유니버시티라고 불렀는데, 그곳의 쓰레기장에 가면 책이나 서류로 사용된 종이가 많이 버려져 있었죠. 타이핑에 사용된 종이는 뒷면이 흰색이었기 때문에, 공책으로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잔뜩 가져왔어요. 책 중에서도 쓸만한 게 없는지 찾아봤어요. 대학교에서 쓰는 대수학 책이 있더군요. 내용을 봤더니 일차 방정식과 이차 방정식, 인수분해 등이었어요. 저도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가 될 것 같아서 그 책으로 공부를 했죠. 마에하라 하이스쿨을 졸업할 때까지 교과서는 없었어요. 나중에 마에하라 하이스쿨은 지금의 가쓰렌 중학교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밥은 반 정도밖에 안 나와서 항상 배가 고팠죠.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느낌이었어요.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하이스쿨 졸업 후)오전 중에는 밭일을 했어요. 그때는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밭일도 해야만 했죠. 오후에는 매형에게 빌린 (영어)책을 베껴 쓰며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이 늘자, 매형이 일하는 포스트 엔지니어라는 곳에 오키나와인 숙소의 사무원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 사무소장의 영어는 이해하기 쉬우니까 공부가 될 거라는 권유를 받고 거기에 취직했어요. 저는 그 소장과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노력했죠. 매형에게 빌린 영어책도 전부 베껴 쓰다 보니 영어 실력이 제법 괜찮아졌어요.
 당시에 오키나와 외국어 학교가 구시가와의 다바에 있었죠. 입학 시험을 봤고, 합격했어요. 오키나와 외국어 학교에 반년 정도 다녔고, 그 뒤 류큐 대학에 다녔죠. 류큐 대학의 입학 시험을 치기 전에 기타나카구스쿠 중학교에 결원이 생겼으니 영어 교원으로 일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 때 (대체 교원으로)1년간 근무했죠. 언제까지나 대체 교원으로만 일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입시 준비는 전혀 안 했지만 초등학교 교사 양성 과정이라면 붙을 것 같아서 시험을 봤더니 합격했어요.
 초등학교 교사 양성 과정에 입학했지만 저는 그림이나 서예가 서툴렀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서, 코스를 바꿔 다시 대입 시험을 준비했죠. 1학기 말에 휴학 신청을 하고 처음으로 수험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4년 과정의 학부에 입학했죠. 저는 류큐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역시 본고장 영어를 배우려면 미국에 가야 할 것 같아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거기서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쟁을 경험하고 나니)정말 말도 안 되는 전쟁이었죠. 어떻게든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키나와 전투를 막을 수 있는 힘도 없었고,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라는 흐름을 타고 있었죠. 제 동급생도 115명이 입대해서 65명이 전사했어요.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도
14만 명이 사망했고, 그 외의 군인과 군무원도 포함해 24만 명이 마부니의 위령탑에 잠들어 있죠.
 전쟁이란 건 매우 큰 비극을 일으키므로,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사토 쇼토쿠 씨는 미국에서 탄생한 청량음료 ‘바야리스’의 제조·판매 회사에서 근무하다 오키나와 본토로 복귀한 후, ‘주식회사 오키나와 바야리스’를 설립해 44년간 경영에 종사했습니다. 2018년에는 류큐신보사에서 경제산업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학도병으로서의 전쟁 경험과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널리 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