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부터의 발자취전쟁 체험자 전시/전후 증언 영상

‘작살 낚시’의 뒷바라지를 한 우민추의 아내

오아사 하쓰코 씨

생년:1935 년

출신지:요나구니정

구부라에서의 공습 체험

 (오키나와 전투 당시에는)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최초의 공습(오키나와 대공습)이 있었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죠. 그때 아버지는 방위대에 소집되어서 안 계셨고, 어머니는 밭의 피난용 오두막으로 짐을 옮기던 중이었어요. (공습 시작 후)부모님이 부재중이라 저는 여동생을 업고 도망쳤어요. 대피용 벙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미군 전투기가 날아왔는데,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가운데 우리 둘은 벙커에 들어가 목숨을 건졌죠. 공습 때, 비행기 소리가 들려서 제가 뒤를 돌아봤더니, 마을 사람들이 “만세!”라고 외치며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였어요. 경호반 사람들은 마당에 나가서 “아군(일본군) 비행기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아군인 줄 알았던 비행기가)기관총을 쏘아대자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도망쳤어요. 도망치다가 나무 사이에 낀 사람도 있었다나 봐요.
 소이탄이 떨어져서 마을은 모두 불타 버렸어요. 우리 가족은 우리 밭에 오두막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거기로 도망쳤어요. 우리 가족은 미리 오두막을 세워 둔 덕분에 거기서 생활할 수 있었죠. 다른 사람들은 벙커 등으로 도망쳤어요.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은 대부분 산으로 대피한 사람들이었어요. 부모님은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들을 옮기거나 장례를 도왔죠.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밭에 고구마를 많이 심어 두었던 덕분에 먹고사는 데 큰 불편은 없었어요. 아버지는 어부로 일하셨기에 (다른 사람의 배가 좌초되면)좌초된 배에 실려 있던 다시마와 통조림 등을 주워서 집으로 가져와 다 같이 나눠 먹었어요. 그래서 식량은 크게 부족하지 않았죠. 고구마를 직접 재배하고 있었으니까.
 공습이 있었을 때도 학교에서는 가끔씩 수업을 했어요. 구부라 출신의 선생님도 있었어요. 우리 밭 근처에는 샘물이 나오는 곳이 있었고. 그 부근에 벙커가 있었어요. 그 벙커에 인근 학생들이 몇 명씩 모였고, 가끔씩 선생님이 오면 거기서 다같이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자주 수업을 하진 않았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당시에 저는, 우리 집도 불타서 잿더미가 되긴 했지만 새 집을 짓고 피난 오두막에서 이사했을 때는 전쟁이 끝났구나, 우리 마을에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학교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가족들이 모두 건강했으니 그거면 충분했어요. (전쟁 중에는)함포 사격의 탄환이 날아와서 매우 놀랐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어요. 함포 사격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치거나,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나갔어요.

종전을 맞아 호경기의 시대로

 (종전 직후의)구부라 마을에서는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구부라의 인구도 꽤 줄어 있었어요. 학교에는 초가지붕 건물이 있었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 학교도 문을 열었던 것 같아요.
 종전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호경기가 시작되었어요. (호경기 때의 구부라는)굉장히 활기가 넘쳤답니다. 저희 아버지를 포함한 우민추(어부)들은 고기잡이를 하러 바다로 나갔어요. 종전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대만과의 교역이 시작되었죠. 작살 낚시를 하던 어선도 대만까지 갔어요. 섬 밖에서 구부라로 일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죠. 삼판(sampan)이라는 큰 거룻배를 만들었어요. 당시의 배는 썰물이 되면 자유롭게 항구를 드나들 수 없어서, 배를 바다에 세워 두고 삼판을 이용해 짐을 넘겨 주곤 했죠. 그때는 정말 활기가 넘쳤어요. 종전 후에는 어딜 가도 먹을 게 없는 시절이었지만, 구부라 마을만은 식량 걱정이 없었어요. 짐만 하나 옮겨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대여섯 살 정도의 아이들도 짐 나르는 일을 돕곤 했어요. 그런 시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겠죠.

활기찬 구부라 마을의 모습

 닭도 많았어요. 여기저기서 키웠거든요. 마을 안에는 쌀이 잔뜩 든 가마니가 쌓여 있었고요. 팥 같은 것도 가마니에 들어 있었죠. 구부라에서는 닭조차 떨어진 쌀알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량에 관해서는)다른 지역보다 풍족하게 살았어요. 각 가정이 민박집처럼 되어 있어서, 대만인이나 오키나와 본섬 사람이 머물다 가곤 했어요. 오키나와 본섬 등에서 물자가 많이 들어왔죠. 오키나와 본섬에서는 미군의 외투나 담요, 카키색 작업복 등 미군 물자가 많았어요. 또 대만에서 온 물자에는 채소나 팥 같은 콩 종류, 말린 죽순이 있었죠. 우리는 말린 죽순을 질리도록 먹었어요. 말린 죽순은 삶아서 먹었어요. 이 밖에 쌀국수 면과 녹두로 만든 당면과 굵은 설탕, 다양한 색깔의 설탕과 백설탕 같은 것도 있었어요. 알사탕도 있었고, 먹을 게 참 많았어요. 18L 들이 대용량 캔에 든 물엿도 있었죠. 그리고 대꼬챙이 같은걸 써서 물엿을 팔곤 했어요.
 당시 이 주변은 ‘포장마차 거리’로 유명했답니다. 다다미 2장 정도 크기의 지붕으로 만든 포장마차가 수십 개나 있었거든요. 이 일대는 옛날에 협동조합 시장이었어요. 나하에서 온 사람, 이토만 사람, 미야코 사람 등 장사를 하기 위해서 여러 곳에서 왔죠. 여기서 결혼한 사람도 많이 있었고요. 여기서 가까운 언덕 위에 요정이 몇 집이나 있었어요. 극장도 있었죠. 홋타 가쓰오부시 제조 공장이 있었던 곳에는 막을 친 극장이 있었어요. 와타부 쇼(당시의 음악 만담 쇼) 공연도 있었죠. 또 (당시의 연극 배우)오나가 고지로의 극단도 종전 후 바로 소나이 마을로 왔던 모양이에요.
 어린아이들도 짐 운반을 거들곤 했어요. 작은 짐 하나라도 옮기면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 아무튼 그때 당시에는 뭐든 다 있었어요. (호경기 때는)저는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짐 나르는 일을 해본 적은 없어요.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왔기 때문에 부모님의 일을 거들었지요. 호경기는 1~2년밖에 이어지지 않았어요. (끝난 것은)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네요.

전쟁 후 요나구니의 우민추

당시의 어부들은 대만과의 교역으로 돈을 벌었지만, 그 후에는 가다랑어 잡이 등의 어업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어요. 그때는 청새치가 안 잡혀도 가다랑어만 잡히면 돈벌이가 됐죠. 가쓰오부시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돈이 되는 가다랑어도 많이 잡았어요. 대만 근처의 메쿠라소네(어장)까지 가서 가다랑어를 잡았다더군요. 어부들은 새벽 2~3시부터 고기를 잡으러 나갔어요. 당시의 어선은 현재의 어선만큼 빠르지 않아서,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어장에 도착하지 못했을 거예요. 겨울이 되면 바다가 거칠어지니까, 10월 무렵까지는 대만 근처의 어장으로 갔던 것 같아요.

어부 남편과 2인3각

(저와 결혼했을 때)남편은 가다랑어 잡이를 했었죠. 그 후에는 청새치의 작살 낚시를 시작했어요. 남편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다른 일을 하겠다며 선장을 따로 고용했고, 선원들도 7~8명 정도 고용했어요. 청새치 낚싯배로 이시가키지마에서 얼음을 사 온 뒤, 잡은 청새치를 며칠 동안 얼음에 보관했다가 미야코지마까지 팔러 갔어요. (저희 남편은)장사를 좋아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구상하곤 했죠. 이시가키지마에도 팔러 갔고요. 남편이 조립식 냉장고를 사 왔어요. 그 후에 리어카도 사 와서 우리 둘이 청새치를 날랐죠.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저도 남자 못지않게 일했거든요. 우리 둘이서 청새치를 리어카에 싣고 창고까지 끌고 가서 내장을 깨끗이 제거한 뒤, 처마 밑에 매달았어요. 남편이 (청새치의)머리 쪽, 저는 가벼운 꼬리 쪽을 메고 날라서 청새치가 팔릴 때까지 냉장고에 매달아서 보관했죠. 또 남편의 배가 들어오면, 새로운 얼음도 실려 있으니까 그걸 바로 옮겨 실었어요. 또 원래 있던 배가 작다고 해서 모선을 샀죠.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저도 많이 고생했어요. (우리 집에는)아이들도 많았으니까요.

어부 생활의 변화

 제가 시집왔을 때쯤 남편은 2, 3척의 청새치 낚싯배를 가지고 있었는데, (섬 내의 작살 낚싯배는)20척 이상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호경기 후에는 집단 취업의 영향으로 선원이 부족해졌어요. 섬의 청년들은 집단 취업을 통해 일본 본토로 일하러 갔으니까요. 남편의 작살 낚싯배 선원이 없어져 버렸죠. 남편은 혼자가 되었기 때문에 작살 낚싯배를 팔아 치웠어요. 다른 어부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거예요. 그 후에는 지금과 같은 강화 플라스틱제 어선이 되어서 혼자서도 청새치 잡이를 할 수 있게 되었죠. 당시의 요나구니지마에서는 진학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옛날에는 선원이나 요리사를 꿈꾸는 청년들이 많았거든요.
 옛날 선장은 선원 몫도 나눠 줘야 했으니 여간 많이 잡히지 않으면 힘들었어요. 선장은 어획량을 늘리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죠. 7, 8명의 선원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배에 무전이 달려 있지만, 당시의 어부는 나침반에만 의지해야 했어요. 그래서 어장으로 갈 때, 지금은 일기예보에서 파도 높이를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날씨가 괜찮으면 빈번히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바다가 거칠어지면 항구로 돌아왔는데, 거친 파도를 피할 수 없을 때는 일단 대만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돌아오지 않으면 조난당했다고 생각해야 했어요. 제 남편도 결혼 전에 1번 조난을 당해서 대만으로 떠내려간 적이 있거든요. (조수의 흐름을 따라가면)대만으로 갈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전화도 없는 시대였으니까, 항구로 돌아오지 않는 한 생사조차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고기잡이를 나가면 가족과 친척들은 집에 모여서 살아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죠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세상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에요. 두 번 다시 그런 전쟁은 일으키지 말았으면 해요. 저는 전쟁보다 모두가 착하게 사는 것,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착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오토모 하쓰코 씨는 현재도 구부라항에서 생선 중매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편 도쿠조 씨는 청새치 낚싯배 선주로, 여러 척의 ‘작살 낚싯배’를 소유했습니다. 전쟁 후의 호경기 시절에는 대만의 동해안과 요나구니지마 근해를 왕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