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부터의 발자취전쟁 체험자 전시/전후 증언 영상

‘다이라시’와 나의 전쟁 후 생활

시마부쿠로 도쿠지로 씨

생년:1936 년

출신지:나고시

아버지의 고향 오키나와로

 1943년 후반에 고토부키마루라는 배를 타고 하루 밤낮에 걸쳐 가고시마의 도쿠노시마에서 모토부항으로 왔어요. 하네지촌의 오야카와는 환경도 좋고 맛있는 쌀을 재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인 오키나와로 이주하게 되었죠. 오키나와에는 부모님과 누나, 저와 여동생까지 다섯이서 왔습니다.

하네지에서의 생활과 오키나와 전투

 생활을 위해서는 벼를 심어야 했죠. 우선 천 평의 논 가운데 200평에 벼를 심었어요. 모내기 작업은 밤에 했고요. 낮에는 방공호를 파거나 했죠. 그 후 오야카와에서 다이라 마을로 이동했어요. 우리 집은 없었기 때문에 집을 빌려서, 긴조 상점이라는 곳에 가족 다섯 명이 살았죠. 거기서는 어묵 만들기와 생선 파는 일을 도우며 생활했어요.
 마을의 방공호는 1반부터 반 단위로 팠죠. 다이라에는 방공호가 많이 있었어요. 1km 사방에 여섯 개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방공호에는 쉽게 못 들어갔어요. 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못 들어갔죠. 방공호가 더 많이 필요했어요. 우리가 사는 집 옆에 방공호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방공호 안에서는 어린아이가 울면 어린아이의 입을 막으라고 매정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우리 가족은 도쿠노시마에서 온 지 아직 1년이 채 안 되어서, 피난민들은 우리 가족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 가족 다섯은 산속의 숯을 굽는 오두막으로 피난했죠. 그곳에 하루 밤낮을 머물렀다가, 미군이 산으로 쳐들어오자 산 위쪽으로 이동해 피난처를 몇 군데 전전했어요. 모두 함께 대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다섯 가구가 피난했죠. 그중에는 가족이 열 명이나 되는 가구도 있었어요. 미군이 빈번하게 방송을 했고, 위험했기 때문에 다 같이 협의해서 모두 함께 이동했고 식량 같은 것도 나누기로 했죠. 다행히 좋은 피난처를 찾았어요. 선박 재료 가게를 운영하던 단독 주택이었죠. 집은 물론 헛간도 훌륭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피신했어요. 그 집에서는 헛간에서 일할 수 있고 쌀과 고구마 같은 식량도 있었죠. 아버지는 타이어 운반과 밭일을 도왔어요. 지금까지 보고 배운 기술로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죠.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아버지가 미군에게 연행되다

 미군이 다노다케를 공격하고 돌아오던 중, 수많은 미군이 피난처 앞을 지나가다가 세 명의 미군이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고 몸수색을 하더니 끌고 갔어요. 그게 1945년 6월 6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네지 오카와 마을에서의 피난 생활은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 3가구가 함께 산중에서의 피난 생활을 시작했죠. 거기에는 먹을 것도 없어서 소철을 발효시켜 먹었어요. 제일 맛있는 음식은 털머위였는데, 피난 생활 전부터 자주 먹곤 했죠. 돼지기름만 조금 있었고 그 외에는 쌀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을 처리하고 남은 가죽이나 손톱 같은 걸 주워 오면 함께 피난 중인 사람들이 요리해 주곤 했죠. 피난 오두막은 간단한 구조라서 비가 오면 비가 샜어요. 피난 오두막을 수리해 가며 생활했죠. 그때 또 미군이 왔고, 식량을 구하러 갔던 형들이 살해당했어요. 그 형들의 시신은 나뭇잎으로 숨겨 매장했죠.
 당시 몸이 튼튼하기로 소문이 났던 우리 아버지는 미군들에게 발가벗겨져 몸수색을 당한 후, 포로로 잡혀갔어요. 더 이상 산속에서의 피난 생활을 계속하기 어려워졌고, 포로가 된 아버지의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 산에서 마을로 내려갔는데, 그 와중에 물건을 강탈당하기도 했죠.

아버지를 면회하러 노동자 수용소로

 노동자 수용소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누나 두 명이 새 피신처와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 줬어요. 가와카미 마을의 니지마 선생님 댁에 살 곳을 확보해 뒀으니 당장 산을 내려오라고 하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산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내려오면 간첩 혐의로 일본군에게 살해당할 거라는 말도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노동자 수용소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들어서, 산을 내려갔어요. 새로운 거처는 피난용 오두막이 아니라 비도 새지 않는 훌륭한 집이었죠. 거기서 수용소에 있는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네 명이서 살았어요. 그리고 그 누나들이 토요일마다 같이 가자고 해서, 매주 아버지가 수용된 노동자 수용소에 갔죠.
 취사반인 아버지를 면회할 때마다 먹을 것을 얻어 오곤 했어요. 수용소에는 주먹밥도 남아돌았기 때문에, 그걸 햇볕에 말린 된장의 원료나 설탕, 소금 같은 것도 주시곤 했죠. 또 아이스크림 가루나 과자 같은 것도 받아 왔어요. 산에서의 피난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죠. 수용소 주위에는 철망이 쳐져 있고 감시가 삼엄했어요. 그래서 사무 담당 누나들과 같이 면회를 갔죠. 어느 날, 통로 근처에서 담배와 과자를 끌어안은 채 죽은 사람을 봤어요. 불쌍한 마음에 시신을 덮은 천을 걷어 보려 하자, 미군이 감시탑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하지 말라고 누나가 말리더군요. 수용소에 잠입한 사람이 미군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어요.
 수용소 안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는 게 참 즐거웠죠.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산에서의 피난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어요. 6월에 산을 내려와 이듬해 1월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죠.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는 말라리아에 걸려 버렸어요. 그 무렵에는 매일같이 말라리아 희생자들의 시신이 리어카로 옮겨져 매장되었죠. 중남부에서 온 피난민들도 모두 똑같이 매장됐어요. 아버지도 말라리아에 걸렸기 때문에 수용소를 나와 마을로 돌아오게 됐죠. 고열 때문에 일반 물이 아니라 찬 우물물을 길어 와서 두레박에 작은 구멍을 뚫어 이마에 물을 계속 끼얹었어요. 그래도 열은 내리지 않았고 체온계로 잴 수도 없을 정도였죠. 그러고 나서는 엄청나게 몸을 떨었어요. 남자 둘이서 눌러도 뿌리칠 만큼 발작이 심했죠. 결국 아버지는 말라리아의 고열로 인해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다이라 마을로 돌아가게 됐죠.

아버지의 죽음 후 다이라 마을로

 다이라 마을로 돌아가고 나서는 정말 힘들었어요. 집은 텐트를 쳐서 만든 오두막이었죠. 폭풍이 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났어요. 우리 가족은 마구간 출입구에 텐트를 치고 생활을 했죠. 마구간에도 나하와 차탄에서 온 피난민들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다이라에는 피난민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집이든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죠. 먹고 살기에 정신이 없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옛날에 익힌 기술을 살려 생선을 사다가 어묵을 만들거나, 생선을 팔아서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필사적으로 일했죠.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는 무척 노력하셨어요. 두부 주문이 들어왔을 때는 저도 어머니를 도왔죠. 어묵을 만들 때는 생선을 으깨는 기계를 돌렸고요. 텐트 집에서 두어 해쯤 지낸 뒤에 지금의 하네지 초등학교 근처에 집을 빌렸고, 거기서도 어머니를 도우면서 살았어요. 행사가 있을 때는 주문이 많아서 일이 바빴는데, 아무리 적자가 나더라도 히가시촌이나 나고의 어민들에게 물고기를 매입해 왔죠. 우리도 어머니를 도우며 두부랑 어묵을 만들었어요. 그러려면 장작이 필요했죠. 학교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는 한 번, 일요일에는 두 번, 지금의 하네지댐이 있는 곳의 산 위로 나무를 하러 갔어요. 당시에 어느 집이나 다 똑같았죠. 그게 아이들의 일이었어요. 두부를 만들려면 좋은 바닷물이 필요했죠. 그걸 길어 오는 것도 아이들 몫이었어요.
 언제까지고 셋방살이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건축용으로 토지를 교환했죠. 우리의 특급 100평 토지와 3급 300평 토지의 교환이었어요. 같은 논의 땅이기 때문에 승낙을 받았죠. 그 후에는 초가집을 지었어요. 돈을 좀 더 벌기 위해, 두부나 어묵을 만들 때 나오는 남은 음식을 먹이로 쓸 수 있는 양돈을 시작했죠. 선배들한테 제공을 받아서 돼지를 다섯 마리 키웠어요.
 어느 날 미군 세탁반에서 일하던 분이 파우더(흰 가루)를 받아 왔더군요. 베이킹파우더라고 쓰여 있는 용기의 내용물을 옮겨 담은 거였는데, 그걸로 사타안다기(설탕 튀김)를 만들었어요. 파우더를 한 번 넣었는데 부풀어 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 세 번 넣었더니 큰일이 났지 뭡니까. 파우더를 한 번 넣은 튀김을 먹은 사람은 지금도 건강해요. 두 번 넣은 경우는 약간 머리가 빠지긴 했어요. 세 번 넣은 튀김을 먹은 분들은 바로 돌아가셔서 그분들의 무덤이 줄지어 있죠. 튀김 중독 때문이었어요. 세탁반 직원이라 미군 기지에도 설탕 튀김을 가져갔죠. 그걸 먹은 미군도 사망했어요. 사인은 튀김 중독이라고 하더군요. 베이킹파우더와 살충제, 벼룩 잡는 가루를 착각했던 모양이에요. 조리할 때 실수로 잘못 넣어 버린 거죠.

다이라시의 탄생

 종전 직후에 다이라시에는 인사 감독서가 생겼어요. 군대 일을 할 노동자의 필요 인원에 대해 미군이 명령을 내리면 인사 감독서가 작업을 할당했죠. 또 미군이 임명한 민간 경찰을 ‘CP’라고 했는데, 산 같은 데로 피난한 사람들이 피난처로 물자를 가져가자 CP는 사람들이 산으로 피난하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몰수했어요. 사람들이 산으로 피난하지 않게 되자 나중에는 야간 외출도 금지했죠. 우리도 친척 집에 가려고 했더니 이제 저녁이니까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이라에는 경찰서와 인사 감독서가 생겼고, 시청은 오야카와 마을 안에 생겼어요. 피난민이 모인 다이라 수용소에는 인근 마을까지 합치면 거의 6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죠. 당시 인구가 집중된 곳은 하네지촌 다이라였어요. 논과 식량도 있었기 때문에 중남부에서 온 사람들의 피난지가 되었죠. 사람들은 초가집 같은 걸 짓고 일반인 수용소에서 이동한 뒤 생활을 시작했어요. 중남부에서 온 피난민들은 마을 내의 빈집에 살고 있었죠. 그래서 집주인은 자기 집인데도 들어가지 못하고, 헛간이나 다른 마을의 빈 곳을 빌려 생활해야 했어요. 자기 집인데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상태였죠. 피난민들은 집도 식량도 모두 미군에게 받은 거라고 했어요. 집과 식량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면 CP와 인사 감독서에 고발한다고 했다더군요. 어떤 집주인은 불단이 있는 곳만이라도 비워 달라고 피난민에게 부탁했어요. 안 그러면 집을 다 부수겠다고 강경하게 말했기 때문에, 이치반자(응접실)만은 비워 줘서 살 수 있게 됐죠. 나하나 중남부에서는 전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마을의 집에서 마루나 문짝을 뜯어서 가져갔어요. 다이라에는 그렇게 텅 비어 버린 집들이 아주 많았죠.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쟁은 이제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서 외국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죠. 아무 관계도 없는 어린이들까지 모두 희생되고 있어요. 전쟁만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시마부쿠로 도쿠지로 씨는 오키나와현 경제 농업 협동조합 연합회에서 약 33년간 근무했습니다. 퇴직 후에는 지역 교통 안전 지도원으로 일했으며, 오랜 세월에 걸친 지역 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2017년 오키나와현 교통 안전 협회에서 표창을 받았습니다. 현지 소식지인 《다이라지》의 부편집장을 역임하며 지역 네트워크 구축에 힘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