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부터의 발자취전쟁 체험자 전시/전후 증언 영상

그림이 말해 주는 야에야마의 전쟁

시오히라 마사미치 씨

생년:1933 년

출신지:이시가키시

전쟁 격화 전의 야에야마

 저는 1933년, 이시가키지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부모님과 할머니, 형이 있었는데 형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소집되어 섬 안에 있는 일본군의 부대에 배속되었어요. 아버지는 당시 식량 영단(식량 배급 및 저장 등을 담당)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그 영단의 야에야마 지부장을 맡고 있었죠. 주민의 식량을 확보하는 게 아버지의 임무였어요.

공습이 시작되다

 1944년 10월의 ‘오키나와 대공습’ 때는 이시가키지마에서도 공습이 있었어요. 최초의 공습 때 다케토미지마와 이시가키지마 사이에 일본 군함 두 척이 정박하고 있었거든요. 거기에 갑자기 미군 전투기 그루먼이 나타나 그 군함을 공격했어요. 그랬더니 이시가키지마에서 일본군이 고사포로 엄호 사격을 시작하더군요. 처음 보는 광경이라 흥미가 생겨서 해안까지 구경하러 갔죠. 나중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이시가키지마에서 고사포를 쐈더니 공중에서 폭발해 그 파편은 다케토미지마에 떨어졌다더군요. 그래서 다케토미지마에는 적(미군)의 총알이 아니라 일본군의 고사포 파편이 비 오듯 쏟아졌다는 이야기를 종전 후에 들었어요. (그 당시)저녁이 되면 고하마지마 쪽에서 서너 대의 미군 전투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이시가키지마 시가지의 해안선 서쪽에서 동쪽에 걸쳐 기관총 공격을 퍼부으며 날아갔죠.
 당시 대만으로의 피난은 반 단위로 실시했어요. 우리 가족도 대만으로 피난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다음 주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그 공습을 당했기 때문에 대만으로의 피난은 취소되었어요.

종전 전의 학교 생활

 전쟁이 끝난 해인 1945년 4월에 저는 구제 중학교에 입학했어요. 격렬한 공습 속에서도 입학식이 열렸는데, 두어 번 중단됐어요. 교사 근처에 폭탄이 떨어져 파편이 날아오는 바람에. 선배의 허벅지에 맞아 피가 나기도 했고요. 그런 상황에서 열린 입학식이었죠. 입학식에서 교장 선생님이 오늘부터 너희는 중학교 1학년이라는 그런 훈사를 마친 뒤, 바로 철혈 근황대의 대장이 대신 인사를 하더군요. 대장은 입을 열자마자 “오늘부터 너희는 철혈 근황대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철혈 근황대의 대원이 되었죠. 공부는커녕 집에서 괭이를 들고 매일 학교에 다녔어요. 그리고 학교 교정을 매일 갈아엎고 고구마를 심었죠. 식량난이 심했던 시대였으니까. 그리고 기념 운동장이라는 장소가 있었어요. 현재 우미노호시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죠. 돌이 많은 곳이었는데, 암반 사이에 있는 흙을 긁어모아서 수북이 쌓고 거기 고구마를 심었어요. 하지만 그 고구마를 제가 먹을 수는 없었고, 섬 전체가 식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인 상황이었어요.
 방과 후 친구와 둘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야토리온의 도리이 앞을 지나던 중, 미군 전투기가 날아왔어요. (상공에서)우리 모습이 보였는지 우리를 겨냥해서 기관총을 쏴대더군요. 근처에 민가가 있고 울타리 옆에 후쿠기 가로수가 있었기 때문에 큰 후쿠기 그늘에 숨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공습이 끝나고 나서 나무를 보러 갔더니 나무에는 탄흔이 남아 있더군요. 그 나무가 없었더라면 총알은 제가 맞았겠지요.

피난 시의 식생활

 1945년 6월 1일, 6월 10일까지 산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어요. 15일쯤 이시가키지마에 적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주민들은 미리 산속에 대피소를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모두 그곳으로 도망치게 되었죠. 그날 미군은 상륙하지 않았지만 격렬한 공습이 있었어요. 대피 명령이 떨어지기 전부터 식량난은 계속되고 있었죠. 매일같이 계속되는 공습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까요.
 그 무렵에는 ‘무이앗콘’을 캤어요. ‘무이앗콘’은 야에야마 사투리로 캐지 않고 남겨 둔 고구마라는 뜻입니다. 무이앗콘이 있는 곳에는 땅 속에 고구마가 자라고 있으니까, 다 같이 그걸 찾아서 캐내서 먹었죠. 고구마를 다 먹어치운 다음에는 길가나 밭 옆의 들풀을 뜯어서 먹기도 했고요. 그리고 파인애플 같은 동그란 아단 열매가 있었어요. 그 열매를 하나하나 긁어내서 열매 뿌리의 부드러운 부분을 베어먹곤 했죠. 비가 오면 바로 들로 나가서 달팽이를 잡았어요. 지금도 있는 평범한 달팽이요. 평소에는 고구마 잎 뒤에 숨어 있는데, 비가 오면 잎 밖으로 나오니까 그걸 잡으러 갔어요. 국물에 달팽이를 넣고 먹곤 했었죠. 이따금씩 들에 있는 개구리를 잡아 소금을 찍어서 구워서 먹기도 했어요. 개구리는 최고의 별미였답니다.

전쟁 말라리아

 일본군으로부터 퇴거 명령이 떨어졌어요. 모든 주민은 산으로 대피하라고 해서, 우리 가족도 3개월 정도 산으로 피신해 있었죠. 피난처(시라미즈)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말라리아에 걸렸어요. 저도 말라리아에 걸려 열이 40,8도까지 올랐죠. 3, 4일마다 열이 났고 그때마다 이마 위로 물을 끼얹어 계속 열을 식혔어요. 한 달 가까이 발열이 계속되었죠.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한 후로부터 20일 정도 지나자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현재라면 그 정도는 죽지는 않겠지만, 그때는 다 영양실조에 걸려 있어서 금방 사람이 죽어나갔죠. 저녁이 되면 죽은 사람들을 짊어지고 옮겨서 피난처 근처의 밭 옆에 시신을 묻었어요. 매장된 사람도 있고(화장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해가 져서 적의 전투기가 오지 않게 되면 밭 옆에서는 (시체를) 화장하는 연기가 피어올랐죠.

종전을 맞이하다

 산속에서의 피난 생활 중 오키나와 본섬의 옥쇄 소식이 들려왔어요. 오키나와 본섬에서의 전쟁이 끝났다고 했고, 마침 그 무렵 이시가키지마의 공습도 없어졌고요. 더 이상 산에서 생활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 같긴 했어요. 미군 전투기에 발견되었는데도 기관총을 쏘지 않았고, 저공비행을 하더니 조종사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더군요. 그래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채고 모두 산을 내려갔어요. 피난민의 절반 이상은 산속에서 종전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우리 가족은 종전 전에 산을 내려왔어요. 아버지가 말라리아에 걸려 열이 났기 때문에, 수건을 식혀 이마에 대는 등 제가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있었죠. 그때 아버지의 지인이 일본이 졌다는 걸 가르쳐 줬어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큰 폭탄이 떨어져 일본이 항복했다는 걸 아버지 병실에서 들었죠. 그래서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때는 군국주의 사상에 경도된 군국소년이었기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 울고 있었죠.

종전 직후의 생활

 반상회를 통해 미군에게 쌀과 통조림의 배급을 받았어요. 그 외에는 자기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아서 먹었죠. 저희 집에서도 닭을 키우고 있었는데, 다 먹어서 들판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어요. 그리고 산으로 피난해 있는 동안에 야생으로 도망친 닭들이 있었는데요. 닭인데도 까마귀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날아다니더군요. 그 닭을 잡으러 동급생 친구 대여섯 명과 산에 갔어요. 닭꼬치를 만들어 먹으려 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죠. 모두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산에서 내려와 사탕수수밭에 가서, 밭의 사탕수수를 마음대로 잘라서 베어서 먹거나 즙을 빨아먹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 체험도 했었죠.  배급된 식량은 일주일 정도면 다 먹었어요. 반상회에 미군에게 배급받은 통조림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마카로니를 봤죠. 고기 통조림 같은 것도 있었어요. 배급 물자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비뽑기를 했어요. 그때 제가 가장 큰 고기 통조림을 뽑았기 때문에 부모님께 칭찬받았죠. 그런 일도 있었어요. 배급받은 식량을 다 먹어치우면 또 자급자족하는 생활이었어요. 집에서 쓸 장작을 가지러 자주 산에 갔는데요. 산에 갈 때는 무조건 검문소를 지나가야 했어요. 거기 있는 보건소 직원이 아테브린(말라리아 치료약)과 물을 들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 전원에게 강제로 그걸 먹였답니다.

인상적인 사건

 종전 직후 인상에 남는 건, 우리 집 앞의 길은 화장터로 이어져 있었어요. 종전 전부터 매일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들이 화장터로 실려갔죠. 종전 직후에는 화장터로 가는 시신이 특히 많았어요. 화장터 굴뚝에서는 매일 연기가 나고 있었죠. 화장터 앞을 지나다 보면 화장 순서를 기다리는 시신들이 즐비했고요. 그런 상황이었어요.
 저의 2기 선배는 원래 커다란 집에 살았어요. 전쟁 중 일본군의 장교가 찾아와서 선배님 가족을 다 쫓아내고 그 집을 장교 숙소로 삼아 버렸어요. 그리고 종전이 된 후 장교들은 철수했죠. 선배 가족이 자택으로 돌아와 벽장을 열어 봤더니, 일본군 장교가 숨겨 두었던 퀴닌(일본군에게 지급된 말라리아약)이 든 봉투가 무더기로 발견됐어요. 선배 가족은 퀴닌을 먹고 말라리아를 치료했다고 하더군요. 친척과 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그 선배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미군이 상륙했고, 미군으로부터 지급받은 아테브린(말라리아약)은 반상회를 통해 배포되었죠. 아테브린과 통조림 등의 식량이 배급된 덕분에 우리는 목숨을 건진 겁니다.

종전 후의 학교 생활

 종전 직후 저는 반년 가까이 말라리아를 앓은 탓에 몸이 안 좋았기 때문에 학교를 쉬었어요. 그런 학생들이 꽤 있었죠. (중학교) 1학년 때는 수업을 거의 안 받았어요. 그래도 2학년으로 진급했고 신입생도 입학했답니다. 전쟁 전에 쓰던 구제 중학교 교과서를 학생 몇 명이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교과서를 두세 명이서 함께 읽었죠. 또 그 교과서를 갖고 있는 선생님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교과서 내용을 칠판에 쓰면 그걸 보면서 공부했어요. 종이나 노트, 연필은 거의 없었죠. 그러다 ‘갱지’라고 불리는, 표백되지 않은 갈색 종이가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런 종이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후 미군이 상륙하면서부터 종이 등이 보급되었죠. 초록색이나 파란색 세로줄이 들어간 책자가 있었어요. 그것을 여러 장으로 찢어서 다 같이 나눠 썼죠. 그런 종이를 쓰다 보니 제대로 된 노트가 보급됐어요. 두세 명이 한 권의 교과서를 같이 읽었어요.

민정부와 미군

 현재의 이시가키시 아라카와에 있는 아동 공원 말입니다만, 종전 직후에는 미군 숙소가 있었고 그 주위는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어요. 지프를 탄 미군들이 그 속소를 드나들면서, 민정 관부라고 하는 당시의 야에야마 지청이 있었는데, 미군이 여러 가지 지시를 했어요. 신문을 발행할 때는 신문 기사를 편집하기 전에 민정 관부에서 미군이 신문 기사를 검열했죠. 그 검열을 받은 후 신문을 발행했어요. 당시는 전부 검열당했거든요. 종전 후에는 한동안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을 겁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미술을 배우다

 그 후 저는 야에야마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고등학교의 선택 과목 중에 미술 수업이 있었죠. 미술을 선택한 학생은 서너 명 정도였고, 고등학교에는 미술 선생님이 없었어요. 중학교 미술 선생님이 임시로 고등학교에 와서 우리에게 미술이나 그림을 가르쳤죠. 이 미술 선생님이 아주 괴짜였는데,
“이제 와서 그림 공부를 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라고 하더니 이 책이나 읽으라며 제게 미술 잡지를 주더군요. 그건 미켈란젤로의 화집이었어요. 그 화집에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라는 작가가 쓴 미켈란젤로에 관한 감동적인 해설이 실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미켈란젤로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리고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저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때 이후로 관심을 가지고 미술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미술 공부는 아직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미술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죠. 그래서
제 자신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한 화집을 출판했어요.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쟁이란 참 어리석은 인간의 행위라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요.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왔는지 (저는 지금까지)구체적으로 알려 왔습니다. 아무튼 인류의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미 결론이 난 문제라는 겁니다. 그 사실을 모두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시오히라 마사미치 씨는 미술 작품을 통한 평화 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체험담을 통해 전쟁 말라리아와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