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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고교 야구에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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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0년생
  • 아사토 쓰기노리(安里嗣則)

TIMELINE관련 연표

1940
이시카와시 히가시온나(현 우루마시)에서 출생.
1944
가족과 이주한 사이판에서 전쟁에 휘말리다.
1958
고자고등학교 야구부 주장 시절에 오키나와 야구선수 대표 중 1명으로 봄에 열린 선발 고등학교 야구대회의 견학에 초청되다.
1964
고자고등학교에 체육교사로 부임하여 야구 지도자가 되다.
1965
고자고등학교를 이끌고 제37회 전국 선발 고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
1970
12월 20일, 고자 폭동 현장에 조우하다.
1973
오키나와 고등학교야구연맹의 기술강화부장이 되어 기술력 향상에 매진하다.
1989
이시카와고등학교를 이끌고 제71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
1996
오키나와현 고등학교야구연맹 이사장 취임.
2000
고등학교 교사에서 정년 퇴직 후 오키나와국제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다.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고등학교 야구의 지도자로서 1965년 봄 고자고등학교, 1989년 여름 이시카와고등학교를 이끌고 고시엔에 출전. 오키나와현 고등학교야구연맹에서는 기술 강화를 맡아 사이 히로요시씨와 함께 오키나와 고등학교 야구의 수준 향상을 위하여 힘썼다. 전 오키나와현 고등학교야구연맹 이사장.

미군기지 야구와의 만남

야구와의 만남

종전 후 미군 기지가 생겨 미군이 많이 왔습니다. 히가시온나(현 우루마시)에 있는 이시카와 고등학교 뒤에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흑인 병사들로구성된 부대였습니다. 그 부대 주둔지 옆에 야구장이 두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야구”를 만났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한가했는지 항상 야구를 하고 있었고 우리도 보러 갔습니다. 미군의 야구공은 지금과 같은 경식 야구공이었고 다들 야구를 아주 잘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모두 전쟁에 투입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포수는 앉은 자세로 일루, 이루, 삼루에 맹렬하게 공을던졌습니다. 타격도 연달아 홈런을 쳤습니다. 공이 고구마 밭까지 날아가면 선수들이 주우러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달려가서 공을 발로 밟아 고구마 밭에 숨기곤 했습니다. 미군들은 "공을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미국에서 온 야구 글러브와 유니폼, 방망이, 야구공 베이스 등이 많이보였습니다. 미군들은 그것을 사용하고 경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2, 3학년생이었습니다. 야구동료인 이시카와 요시카즈(石川善一)씨가나보다 당시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군들이 야구하는 것을 계속 야구장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학교가 끝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야구를 보러 갔습니다. 야구장은 중장비를 이용해 기지 밖 오키나와 땅에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은 땅을 마음대로 빼앗아 잇따라 무언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방망이가 부러지면 바로 버립니다. 우리는 그걸 바로 주워서 못을 박아 수리해 사용했습니다. 20~30개가량의 방망이를 주웠습니다. 그런데 글러브는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지에 있는 야전용 텐트를 얻어와 텐트 천을 손 모양에 맞게 오려서 실로 3장을 꿰매고 솜 같은 것을집어넣어 글러브를 만들었습니다. 미군의 낙하산 원단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했기 때문에 그 천으로 언더셔츠와 바지를 만들었습니다. 글러브와 포수 글러브는 텐트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경기에서는 큰 소프트볼을 사용했습니다. 미군이 사용하던 야구공은 홈런볼을 주워다가 야구장 옆에 있는이시카와 고등학교에 팔러 갔습니다. 

당시 이시카와 고등학교에는 고교 야구팀이 있었습니다. 이시카와 중학교에서 전체 오키나와 지역 경기를 했고 중학교 야구, 고등학교 야구 경기대회는 이시카와 중학교에서 열렸습니다. 전쟁은 했지만 종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군들로부터 야구에 대해 여러 가지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만든 도구를 사용했지만 차차 야구 도구가 본토에서 오키나와에 들어왔습니다. 방망이와 글러브는 가격이 비싸서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미군으로부터 얻은 텐트나 낙하산으로 만든 야구 도구를 한동안 사용했습니다. 

전후 고교 야구와 연맹의 발족

오키나와 고등학교야구연맹의발족(1956년)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일본고교야구연맹의 사에키 다쓰오 선생님은 오키나와에 없었던 야구연맹을 만들기 위해 자주 오키나와에 오셨습니다. 그는 “야구를 통해 오키나와를 부흥시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오키나와에 올 때마다 공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오키나와타임즈사의 운동부장이었던 고쿠바 유키씨와 고등학교 체육연맹 이사장 등 관계자들이 모여 오키나와에 고등학교 야구연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사에키 선생님 덕분입니다. 사에키 선생님은 오키나와에 고등학교 야구연맹을 만들기 위해 오키나와 사람들, 특히 이토만의 사람들과 체육협회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후쿠하라 조에쓰씨와 사시키 코유씨 등의 노력으로 오키나와 고교야구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고시엔에 파견된 4명의 고교 야구선수들

당시 오키나와에는 지도자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고교야구연맹에서 오키나와의 고교 야구 선수 4명을 고시엔에 파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고교야구연맹은 자금이 없었는데 일본고등학교야구연맹의 예산으로 파견할 테니4명을 선정해 달라고 오키나와 고교야구연맹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고시엔은 처음이었기에 초대를 받은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에키 선생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매우 기뻤습니다. “고시엔에 갈 수 있다니! 처음 보는 고시엔이다!" 기쁜 마음으로 갔습니다. 

선발된 사람은 이시카와고등학교의 이시카와 요시카즈씨로 당시 오키나와에 제일의 투수로 불리며 이시카와고는 우승 후보였습니다. 다음은 역시 투수인 나하고등학교의 쿠니요시 신이치씨 가장 키가 크고 속구파 선수였습니다. 나하 고교도 우승 후보였습니다. 다음은 슈리고등학교의 주장이자 명 유격수인 나카소네 히로시씨  슈리고등학교가 오키나와 팀으로서 최초로 출전했을 때 (1958년 여름) 그가 선수 선서를 했습니다. 선서를 하고 있는 큰 사진도 남아 있지요. 이 네 사람은 학교는 다르지만 사에키 선생님이 기대를 담아 “장래는 오키나와의 지도자가 돼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강한 당부에 모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에는 야구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나도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시엔대회를 견학하고

본토 선수들이 유니폼을 입은 멋진 모습에반했습니다. 야구장은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행진도 발이 잘 맞아 멋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중 왕정치 선수를 발견하고 모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마침 그가 고시엔에서 활약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야구장과 대회다”우리는 모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경기 전 캐치볼을 하는 방법이나 수비 위치에서의 시트노크 등 선수들의 멋진 움직임에 감탄하고 빨리 돌아가 맹연습을 해서 그들을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에키 선생님은 우리를 고무시키기 위해 우리를 파견하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키나와로 돌아와 고시엔에서 배운 것을 전달하고, 팀원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선발대회 견학은 매우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슈리고등학교 고시엔 첫 출전

사에키 선생님은 “다음은 우승팀으로 고시엔에 와라”고 하셨습니다. 고시엔에 가기 위해 서로 경쟁했습니다. 현 예선의 결과는 마음껏 기량을 펼친슈리고등학교가 우승해 오키나와 팀으로서 처음으로 고시엔에 출전했습니다. 아마도 사에키 선생님의 의도로 나카소네군이 선수 선서를 했습니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슈리고등학교는 1회전에서 3 대 0으로 패했습니다. 그래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10 대 0 또는 20 대 0 정도로 점수 차이가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에 “3 대 0은 훌륭하다”며 기뻐했습니다. 나도 점수는 못 내고 “12이나 13 대 0 정도”로 예상했었습니다. 뜻밖의 결과에 오키나와 사람들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오키나와 고교야구에 있어서 좋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파견된 네 사람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의 고교 야구 선수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일본 고교 야구 연맹의 지원

일본고교야구연맹의지속적인 지원

사에키 선생님은 “야구를 통해 오키나와를 부흥시킨다”는 신념으로 일본고야구연맹의 예산으로17년 동안 본토의 우수한 야구팀을 오키나와에 보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규슈 대표팀이나 대회에서 우승 경험이 있는 팀, 홋카이도나 각지의 선발팀 등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물론 오키나와 팀은상대가 안 됐습니다. 오키나와 쪽 선발팀으로 나하지구 대표팀과 남부 선발팀 등이 있었습니다. 북부에는 선발팀이 없었습니다. 야구 수준이 높은중부지구와 남부지구에서 팀을 편성해 나와 사이 히로요시씨가 감독을 맡아 규슈 대표가 오면 교류 경기를 하곤 했습니다. 역시 경기를 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의 팀은 아직 부족하다"고 격려했습니다. 

당시의 야구 환경

당시에는 야구장이 없었고, 나하고등학교 운동장을 경기장으로 썼습니다. 돌이 많아 공이 불규칙하게 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식 야구장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홈런은 없었습니다. 외야는 석회로 흰 선을 긋고 그곳을 벗어나면 인정2루타가 됐습니다. 나도 인정2루타를 3번 친 적이 있습니다. 공이 선을 넘어가면 2루타가 되었습니다. 인정3루타라는 것은 없었고 선을 넘으면 홈런이라는 규칙이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오락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나하고등학교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몇 차례 본토팀이 오키나와에 온 후에야 오노야마에 야구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노야마는 “야구의 성지”로 불립니다. 드디어 정식 야구장에서 경기를 할 수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타임즈사의 운동부장은 고쿠바 유키 씨였습니다. 신문에서 다룰 만한 스포츠가 적었기 때문에 야구 기사가 연일크게 실렸습니다. 어느 경기에서 나는 퍼스트를 지키고 있었는데 원바운드로 날아온 공을 글러브로 잡았더니 신문에 실렸습니다. “누가 3루에서 2루수인 누구에게 공을 건네주고”“2루에서 1루수인 누구에게 공이 넘어가 더블플레이가 성공했다” “한 번에 투아웃이 되고”'“더블 플레이가 성립됐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하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할 때는 야구용의 검은 모래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돌이 많아 얼굴에 튀기도 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공이 불규칙적으로 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하고등학교의 그라운드에는 잔디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에키 선생님은 17년 동안 상대 팀을 오키나와에 보내주셨고결국 오쿠무야마에도 야구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오키나와에올 때마다 공을 20개 정도 가지고 와서 개회식에서 야구공 증정식을 한 것이 기억 납니다. 오키나와에서 여름 대회가 열릴 때마다 그는 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키나와의 고교 야구가 전후에 이렇게 빨리 강해진 것은 사에키 선생님 덕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당시 사에키 선생님은 일본고야구연맹 회장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팀을 파견한 것은 사무국의 다나베 카즈히로씨였습니다. 일본고교야구연맹이 오키나와에 파견할 본토 팀의 예산을 짜거나문서 발송 등 실무적인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두 분의 17년간에 걸친 지원 덕분에 오키나와의 고교 야구는 강해져 갔습니다. 

고교 야구의 지도자가 되다 

사이 히로요시씨와 함께 지도자를 목표로

본토의 대학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야구를 배운 사람은 나와 그리고 사이 히로요시씨였습니다. 나머지는 류큐대학 체육학부에서 야구를 배웠습니다.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나는 일본체육대학에 진학해 2학년 때부터 정규선수로 유니폼을 입고 정식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한편 사이 씨는 명문 대학교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습니다. 

주쿄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주쿄대학교 감독으로부터 “너는 후보 선수지만”"내가 소개장을 써줄 테니 이걸 가지고 전국의 주쿄대 출신들에게 가서공부해 와라"라는 말을 듣고야구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키나와에게 큰 혜택이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배운 것을 모두 노트에기록하면서 야구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본체육대학 야구부에서 레귤러로 활동했는데 대학 방학 중에는 고향에 가지 않고 도쿄의 니치다이삼고와 니치다이니고, 메이지대 나카노고등학교와 사이타마와 나가노 등의 명문학교를 돌아다니며야구 공부를 했습니다. 나는 선수로서 연습도 해야 했기 때문에 사이씨처럼 감독의 소개장을 들고 각지를 돌아다니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도 각지의 학교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사이 씨는 라이벌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고자고등학교를 이끌고 선발대회 출전

우리 고자고등학교가 1965년 봄 선발전에 출전했을 때1회전은 오카야마히가시 상업고등학교와의 경기였습니다. 그때 상대 투수는 일본 최고의투수였습니다. 그는 1회전부터 결승전까지 전 경기에서 단 1실점밖에 안 했습니다. 그는 히라마쓰 마사지라는 훗날 프로 야구에서 활약하며 “자이언츠 킬러”로 불렸습니다. 자이언츠 선수들도 그의 공은 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투수로 공도 빠르고 제구력도 좋았기 때문에고자고등학교는 3안타밖에 치지 못했습니다. 센터 선수가 2루타 1개를 쳤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모두 완봉패를 당했습니다. 오카야마히가시상업고등학교는 마지막에 1점을 내줬지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런 팀과 경기를 했기 때문에 좋은 공부가 됐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를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선수들도 “열심히 하자”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연습환경 정비에힘쓰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 나는 연습용 그물망 제작에 주력했습니다. 용접 자격증도 있었기 때문에 직접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배팅 게이지도 없던시절이었습니다. 투수가 공을 맞지 않도록 자신이 지도하는 학교와 주변 학교인 오키나와국제대학을 포함해 450개 정도 혼자서 투수 보호망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중학교를 강화해야 고등학교에 좋은 선수가 오기 때문에열심히 만들어서 각 학교에 나눠주었습니다. 잘 갖춰진 연습시설이 당시오키나와에는 없었기 때문에 사이씨도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그가 대단한 점이 도미시로고등학교 시절에 야구장에서 얻어온 타이어를 원동기로돌려 거기에 공을 끼워 넣어 피칭머신을 만들었습니다. 기성품은 180만~200만엔 정도로,고등학교 야구의 예산으로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자동차 회사에서 타이어를 구해다가 모터를 장착해서 그가 피칭머신을 5대가량 만들었습니다. 연습용장비를 손수 만든 사람이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거기에 공을 집어넣어 타격 연습을 했습니다. 오키나와의 야구 지도자들이 근력 훈련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사이씨는 6근짜리 깡통에 시멘트를 넣고 파이프를 꽂아서 바벨을 만들어 근력 트레이닝을 연습에 도입했습니다. 야구용품이 가격이 비싸서 무엇이든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키나와의 지도자들은 매우 고생했습니다. 

오키나와 고교 야구 연맹의 독자적인 대처

오키나와 고교야구연맹의독자적인 노력

나는 “1학년 대회”를 만들었습니다. 1학년이 입학하고 나면 6월에 여름 대회 추첨이 시작되기 때문에 2, 3학년들은 고시엔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에 매진합니다. 1학년들은 거의 정규 선수가 없기 때문에 상급생의 배팅 투수나 공 줍기, 배팅 포수 등 상급생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자신들의 실력을 연마하기 위한 연습이 아니였습니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1학년이 불쌍하다”고 생각해 여름 대회가 끝난 후에 1학년 대회를 열어줬습니다. 그 대회에서는 선수들이 모두 1학년이기 때문에 상급생이 연습을 도와주었습니다. 배팅 투수와 배팅 포수가 돼 공이 멀리 날아갈 때면 2, 3학년이 주우러 갑니다. "너희 1학년들은 야구부에 들어오면서 우리 고학년들을도와줬지 않았느냐”"이번엔 너희가 치고 수비해라. 우리가 도와줄게"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어 팀워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1학년 대회”의 시작입니다. 1학년 대회는 오키나와가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오키나와가 처음 시작한 것은 “야구부 대항 경기”입니다. 고등학교 야구에는 경기가 없는 시즌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반년이라는긴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은 일본고교야구연맹의 규정에 따라 야구 연습경기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사이씨가 의논해서 “야구부 대항 경기”를 생각했죠. 처음엔 6, 7개 종목이었지만 총 8종목이 되어 각 학교가 경쟁했습니다. 종목으로는 멀리 던지기와포수에서 1루, 2루로 신속하게공 돌리기와 베이스 러닝 등입니다. 홈베이스를 출발해 모든 베이스를 도는 베이스간 달리기 그리고 볼 돌리기는 포수 1루수 2루수 3루수가 순서대로 볼을 받아 3루까지 공을 돌리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승부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잘하는 팀들이 모두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또하나의 시도는 “홈런볼”입니다. 오키나와뿐일지도 모릅니다. 홈런을 치면 보조 임원이 공을 주우러 갔다가 본부석에있는 저에게 가져다줍니다. 저는 기록을 보고 몇호 홈런인지 확인하고 공에 번호와 선수 이름을 적고 "축하”라는 글자와 대회명과 학교명을 공에 써서 본인에게 기념으로 주었습니다. 그런 시도를 고교 야구 선수들을 위해 우리는 해왔습니다. 

옛 친구 사이 히로요시씨와의 추억

야구로 이어진 인연 오랜 친구 사이씨의 추억

예전에 사이씨가 항상 "나는 고시원에 두 글자를 놓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준우승을 두 번 경험했지만 “우승”이라는 두 글자를 손에 넣고 싶었고 “우승”을 달성하면 은퇴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수산고등학교를 은퇴한 뒤에도 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습니다. “우승”이라는 잊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간다는 사이씨의 유명한 말입니다. 결국 사이씨는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오키나와의 어린 야구선수들을 위해 꿈을 안겨주는 일을 여러 번 해냈습니다. 감독으로서 고시원에서 29승을 거두었습니다. 모두 좋은 경기였습니다. 오키나와의 초중학생 야구선수들이 모두 사이씨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며 야구에 매진할 수 있는토대를 만들어 준 것이 사이씨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그는 위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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