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살고 살아나가는 힘
- 19311940년생
- 이카리 후미코 (伊狩 典子)
TIMELINE관련 연표
1931 |
슈리시(현 나하시)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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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피란처인 구마모토에서 오빠와 함께 고향인 슈리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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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오키나와청년연합회가 조직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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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은사의 추천으로 류큐대학교 사무국에서 학장의 비서로 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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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청년연합회 부회장 취임.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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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일본청년단협의회에 연수 직원으로 파견. (약 5년 정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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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일본청년단협의회의 해외 파견에 지원하여 중국 14개 도시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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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부인 지도자 해외연수(전국 부인의 날개)에 참가하여 캐나다, 미국, 멕시코 시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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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라디오 오키나와의 ‘사투리 뉴스’의 캐스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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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35년 동안 맡은 ‘사투리 뉴스’의 캐스터에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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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종전 후, 지역 내 청년단 활동에 참가하여 재건을 위하여 일하였으며, 오키나와청년연합회의 임원도 맡았다. 또, 전국 조직인 일본청년단협의회에서도 근무하였으며, 해외연수 등에도 참가하였다. 오랫동안 라디오 프로그램 ‘사투리 뉴스’의 캐스터를 맡아 ‘고향의 말’을 알리는 데 힘썼다.
우치나구치로자기 소개
우치나구치로자기 소개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카리 후미코입니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슈리의 기보초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있어아마미오시마 출신의이카리 노보루씨를 만나서로에게 끌려결혼하고 이카리가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처로부터의 귀향과 청년단 활동
구마모토로 피란
친구, 동급생, 상급생들도 모두히메유리 부대로서 전쟁터에 나갔지만내 오빠가 교사였고나는 하나뿐인 딸이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가나에게 "지금 당장 피란을 가라"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딸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나는 모두의 도움으로 피란선을 탈 수 있었습니다. 나는 교사 자격이 없었지만교사인 오빠의 보조역으로학동 피란선을 탔습니다. 포격을 당해 침몰한 쓰시마마루와는 다른 배였기 때문에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에 “절대적으로 전쟁 반대를 호소하겠다”"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나는 계속 호소할 것이다"그런 반항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삶의 방식을 오키나와 전역에서 가르쳐야 한다"그 강한 마음을 품고 나는 피란처에서 돌아왔습니다. 혼자서는 무거운 짐도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면 든든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 두 사람보다 세 사람, 그런 생각으로 말이죠. 그래서 단체에 들어가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청년단 활동을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년단에서의 유골 수집
청년단 활동으로 유골수습도 했습니다. “살아 남아서 다행이다”라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청년단활동으로 농사용 마대자루를 들고 남부로 유골수습을 하러 갔습니다. 청년단원들이 구해온 마대자루는 야채나 고구마를 담는 것으로나는 손에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마대자루를 등에 메고 돌아다녔습니다. 유골을 찾으면 다리 부분부터 주웠습니다. 정강이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허벅지, 가슴의 늑골마지막으로 맨 위에 두개골을 올려놓았습니다. 지금은 눈알 부분이 무섭게 느껴지지만당시는 무섭지도 않고 "많이추우셨을 텐데"라며 두개골을 껴안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강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지금이라면 떨려서 두개골을 들 수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대신 희생 당하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죽은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부모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슈리 이남 지역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평화로우면 식량을 찾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물만 마셨는데 그 물도 시체가 널려 있는 곳의 물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살기 위해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탈 것이 없으니 남부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시체에 사이에 발이 빠지는 가운데 걸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미안하다”는감정도 없이 밟고 다녔다고 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지요?그런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 반대를 외쳐야 한다""어떤 낙인이 찍혀도 나는지지 않겠다"내 가슴 속 깊은 곳에는 항상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청년단 활동에 대한 생각
당시에는 여자가 청년단 활동을 하면 여자가 남자 행세하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활동했습니다. 그 무렵 요코라는 친구가 변론대회 대표로 뽑혔습니다. 동료가 있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탈 돈도 없이 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 도쿄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갔습니다.
일본청년단협의회에서 다양한 체험
일본청년단협의회에파견되다
당시 회장은 니노미야 타카노리씨였습니다. 청년단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 내가 본토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갈 수 있었던것은 니노미야 타카노리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직접 오키나와까지 오셔서 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당시에는 여자가 청년단 활동을 하면여자가 남자행세하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지만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활동했습니다. 그 무렵 요코라는 친구가 변론대회 대표로 뽑혔습니다. 동료가있다는 생각이내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탈 돈도 없이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일본청년단협의회에파견되다도쿄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갔습니다.
류큐인이라는 말을 듣고
당시의 경험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원점인 일본청년단협의회를 주관하던 조직에서는 각 현의 청년단에서 선발된 남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내가 파견되었을 당시 오키나와는 여권이 필요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왜 여자가나서느냐”라는 말을 들었지만 본토에 가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현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현 대표로 온 분이 "야, 너는 류큐 사람 주제에 어떻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가 나를 자극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 이야기입니다. 젊은 여러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도쿄에서는 여러 현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겁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입니다. “류큐인 주제”라는 말을 들고 화가 나서 "같은 일본인이다. 감히 누가 우리를 류큐인이라고 모욕해?""류큐는 원래 국왕도 있었던 독립된 나라였어" "중국 유학도 간다""당신은 그런 류큐의 역사를 얼마나 아느냐?"“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라”며 본토 남자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해외 활동에도적극적으로 참여
나의 원동력은 오키나와 동료들과의 교류였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지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세금을 선불로 빌려서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모두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그냥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 많은 것을 배우려고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해외 시찰과여성의 활약
중국어도 모르는데 바로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우선 가까운 대만에 가서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을 돌아보고 중국 본토는 14개 도시를 돌았습니다. 외국을 보고 오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은 여성 차별이 없고 여자 교장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고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나는 젊은 시절의 고생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돈도없고 아무것도 없는데도 보고서를 썼습니다. 당시는 여성이 해외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였지만 나는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청년단 활동에서는 동지를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오키나와의 말을 이어받아 전하다
금언(구가니코토바)
“우치나언츄는" 이차리바쵸데 누히다테노아가타” 이 뜻은 “만나면 모두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키나와의 조상님이 남긴황금 같은 말(쿠가니코토바)입니다. 우치나언추(오키나와 사람)는 의지가 강하고 마음이 착합니다. 이 가르침을 계승하겠다는 것이 청년단 활동의원점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의사투리 캐스터로
라디오 오키나와의 아리가키 초대 사장이 "너는 오키나와 사투리를 잘하니 사투리 캐스터로 채택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후나코시 기쇼 선생님이 바로 나를 회의에 불렀습니다. 라디오 오키나와의 회의 중에 뉴스나 신문의 정보를 보고 직접 원고도 썼습니다. 원고 확인을 받고 내가 전부 오키나와 말로 번역했습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나는 오키나와 사투리를 알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듣고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국은 조직이기 때문에 일단 상사에게 원고를 확인받았습니다. 사투리 원고를 보여줘도 모르니까 나중에 전부 오키나와 사투리로 번역했죠. 그래서당시에는 항상 신문을 보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방송을 담당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극복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굶지 않고 잘 먹고 힘을 내고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극복하고 살아남는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능력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되고 전두엽도 측두엽도 모두 풀가동시켜서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그렇다”고 납득하면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납득이 안 가면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집불통 할머니 같네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두 가지의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뭘 하든 뭘 사든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숨 다음은 돈이다” 그렇게 이해하더라도 오키나와의 조상님들이 남기신 선한마음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침후쿠이”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침”은 마음입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나는 벌써 한세기 가까이 살아왔지만 끝까지 버티는 성격이라 200세까지 살려고 합니다. 친구들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갔습니다. 요코를 비롯해 동료가 점점줄어들지만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동료들의 몫까지 끝까지 살아갈 것입니다. 살고 살아 또 살겠습니다.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에게전하고 싶은 것은 살아나가는 힘 판단하는 능력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왜 그렇게말하는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으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나를 “고집불통 노인”이라고 귀찮아합니다. 밥을 해 줘서 고맙고 가족에게 감사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만큼 컸으니""나는 더 클것이다"고 말하면서 말을 듣지 않아요. 그만큼 고집불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이 살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살고 살아 끝까지 사는 “살아나가는 힘” 이것을 이어갈 것을 젊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치나구치로자기 소개
우치나구치로자기 소개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카리 후미코입니다.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슈리의 기보초입니다. 그리고 인연이 있어아마미오시마 출신의이카리 노보루씨를 만나서로에게 끌려결혼하고 이카리가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개처로부터의 귀향과 청년단 활동
구마모토로 피란
친구, 동급생, 상급생들도 모두히메유리 부대로서 전쟁터에 나갔지만내 오빠가 교사였고나는 하나뿐인 딸이라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머니가나에게 "지금 당장 피란을 가라"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딸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나는 모두의 도움으로 피란선을 탈 수 있었습니다. 나는 교사 자격이 없었지만교사인 오빠의 보조역으로학동 피란선을 탔습니다. 포격을 당해 침몰한 쓰시마마루와는 다른 배였기 때문에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에 “절대적으로 전쟁 반대를 호소하겠다”"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나는 계속 호소할 것이다"그런 반항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삶의 방식을 오키나와 전역에서 가르쳐야 한다"그 강한 마음을 품고 나는 피란처에서 돌아왔습니다. 혼자서는 무거운 짐도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하면 든든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 두 사람보다 세 사람, 그런 생각으로 말이죠. 그래서 단체에 들어가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청년단 활동을 통해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년단에서의 유골 수집
청년단 활동으로 유골수습도 했습니다. “살아 남아서 다행이다”라는 말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청년단활동으로 농사용 마대자루를 들고 남부로 유골수습을 하러 갔습니다. 청년단원들이 구해온 마대자루는 야채나 고구마를 담는 것으로나는 손에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마대자루를 등에 메고 돌아다녔습니다. 유골을 찾으면 다리 부분부터 주웠습니다. 정강이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허벅지, 가슴의 늑골마지막으로 맨 위에 두개골을 올려놓았습니다. 지금은 눈알 부분이 무섭게 느껴지지만당시는 무섭지도 않고 "많이추우셨을 텐데"라며 두개골을 껴안았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강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지금이라면 떨려서 두개골을 들 수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대신 희생 당하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젊은이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죽은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부모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슈리 이남 지역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평화로우면 식량을 찾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물만 마셨는데 그 물도 시체가 널려 있는 곳의 물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저 살기 위해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탈 것이 없으니 남부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시체에 사이에 발이 빠지는 가운데 걸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미안하다”는감정도 없이 밟고 다녔다고 합니다. 끔찍한 이야기지요?그런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 반대를 외쳐야 한다""어떤 낙인이 찍혀도 나는지지 않겠다"내 가슴 속 깊은 곳에는 항상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청년단 활동에 대한 생각
당시에는 여자가 청년단 활동을 하면 여자가 남자 행세하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활동했습니다. 그 무렵 요코라는 친구가 변론대회 대표로 뽑혔습니다. 동료가 있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탈 돈도 없이 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 도쿄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갔습니다.
일본청년단협의회에서 다양한 체험
일본청년단협의회에파견되다
당시 회장은 니노미야 타카노리씨였습니다. 청년단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 내가 본토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갈 수 있었던것은 니노미야 타카노리라는 훌륭한 선생님이 직접 오키나와까지 오셔서 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당시에는 여자가 청년단 활동을 하면여자가 남자행세하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지만그래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활동했습니다. 그 무렵 요코라는 친구가 변론대회 대표로 뽑혔습니다. 동료가있다는 생각이내 마음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비행기 탈 돈도 없이배를 타고 본토로 가서일본청년단협의회에파견되다도쿄에 있는 일본청년단협의회 본부에 갔습니다.
류큐인이라는 말을 듣고
당시의 경험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의 원점인 일본청년단협의회를 주관하던 조직에서는 각 현의 청년단에서 선발된 남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내가 파견되었을 당시 오키나와는 여권이 필요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왜 여자가나서느냐”라는 말을 들었지만 본토에 가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현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현 대표로 온 분이 "야, 너는 류큐 사람 주제에 어떻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가 나를 자극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진짜 이야기입니다. 젊은 여러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도쿄에서는 여러 현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겁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입니다. “류큐인 주제”라는 말을 들고 화가 나서 "같은 일본인이다. 감히 누가 우리를 류큐인이라고 모욕해?""류큐는 원래 국왕도 있었던 독립된 나라였어" "중국 유학도 간다""당신은 그런 류큐의 역사를 얼마나 아느냐?"“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우습게 보지 마라”며 본토 남자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해외 활동에도적극적으로 참여
나의 원동력은 오키나와 동료들과의 교류였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의지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세금을 선불로 빌려서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모두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그냥 허송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 많은 것을 배우려고 구석구석까지 꼼꼼히 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해외 시찰과여성의 활약
중국어도 모르는데 바로 해외로 눈을 돌렸습니다. 우선 가까운 대만에 가서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을 돌아보고 중국 본토는 14개 도시를 돌았습니다. 외국을 보고 오려고 생각했습니다. 외국은 여성 차별이 없고 여자 교장선생님도 있었습니다. 그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고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나는 젊은 시절의 고생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돈도없고 아무것도 없는데도 보고서를 썼습니다. 당시는 여성이 해외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였지만 나는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청년단 활동에서는 동지를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오키나와의 말을 이어받아 전하다
금언(구가니코토바)
“우치나언츄는" 이차리바쵸데 누히다테노아가타” 이 뜻은 “만나면 모두 형제자매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키나와의 조상님이 남긴황금 같은 말(쿠가니코토바)입니다. 우치나언추(오키나와 사람)는 의지가 강하고 마음이 착합니다. 이 가르침을 계승하겠다는 것이 청년단 활동의원점이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의사투리 캐스터로
라디오 오키나와의 아리가키 초대 사장이 "너는 오키나와 사투리를 잘하니 사투리 캐스터로 채택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후나코시 기쇼 선생님이 바로 나를 회의에 불렀습니다. 라디오 오키나와의 회의 중에 뉴스나 신문의 정보를 보고 직접 원고도 썼습니다. 원고 확인을 받고 내가 전부 오키나와 말로 번역했습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나는 오키나와 사투리를 알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듣고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국은 조직이기 때문에 일단 상사에게 원고를 확인받았습니다. 사투리 원고를 보여줘도 모르니까 나중에 전부 오키나와 사투리로 번역했죠. 그래서당시에는 항상 신문을 보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메모하는 것이 습관이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방송을 담당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극복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굶지 않고 잘 먹고 힘을 내고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극복하고 살아남는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능력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고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멍하니 있어서는 안 되고 전두엽도 측두엽도 모두 풀가동시켜서 “이 사람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그렇다”고 납득하면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납득이 안 가면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집불통 할머니 같네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두 가지의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뭘 하든 뭘 사든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숨 다음은 돈이다” 그렇게 이해하더라도 오키나와의 조상님들이 남기신 선한마음을 나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침후쿠이”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침”은 마음입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나는 벌써 한세기 가까이 살아왔지만 끝까지 버티는 성격이라 200세까지 살려고 합니다. 친구들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갔습니다. 요코를 비롯해 동료가 점점줄어들지만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동료들의 몫까지 끝까지 살아갈 것입니다. 살고 살아 또 살겠습니다.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에게전하고 싶은 것은 살아나가는 힘 판단하는 능력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이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왜 그렇게말하는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으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나를 “고집불통 노인”이라고 귀찮아합니다. 밥을 해 줘서 고맙고 가족에게 감사하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만큼 컸으니""나는 더 클것이다"고 말하면서 말을 듣지 않아요. 그만큼 고집불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이 살고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살고 살아 끝까지 사는 “살아나가는 힘” 이것을 이어갈 것을 젊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