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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야에야마 개척민의 삶과 말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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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40년생
  • 나카하라 키요마사(仲原 清正)

TIMELINE관련 연표

1950
오기미촌에서 출생.
1950
야에야마보건소 설립. 말라리아 예방을 위하여 이노다에 보건지소가 설치되다.
1951
가족과 함께 이시가키지마로 개척 이주.
1951
10월 31일 이노다 개척 기념일.
1952
이노다 취락에서 열대열 말라리아 발생.
1957
미국의 의과동물학자 윌러 박사 주도로 말라리아 박멸을 위한 ‘윌러 계획’이 실시되다(~1959년).
1960
개척 기념일에 처음으로 이노다 에이사(전통 춤) 공연이 열리다.
1962
말라리아 환자 0명 목표를 달성하며 야에야마에서 말라리아 박멸.
2022
1월, 야에야마 제로 말라리아 기념비 건립기성회 설립.
2022
8월 20일, 말라리아 환자 0명 목표 달성 60주년을 기념하여 ‘야에야마 제로 말라리아 달성 기념비’ 설립.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이시가키지마 이노다 지역에 이주한 개척민들의 노고를 잘 아는 개척 이주 2세. 전후 말라리아 방역의 역사를 기록물로 계승하는 활동을 한다. 이노다 공민관 관장과 야에야마 제로 말라리아 달성 기념비 건립기성회 회장 등을 맡는 등 지역의 역사와 문화 계승에 적극적이다.

전후 개척 이민으로서

오기미촌에서 이시가키섬으로 이주

(아버지는) 전쟁 전에 해외 이민자로 필리핀으로 이주해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가족과 함께 철수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내(선처)와 여섯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큰딸이 얀바루(오기미촌)에 사는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에게 입양되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은 필리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게 지내다가 나가사키에 철수한 후 먼저 어머니(선처)가 돌아가시고 그 후 아이들도 모두 죽고 아버지 한 명만 살아남아 가족의 유골을 가지고 고향인 얀바루(오기미촌)로 돌아왔습니다. 비슷한 처지의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얀바루(오키나와 본섬 북부)라는 곳은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한 밭이 없었습니다. 계단식 밭이 있었지만 모두가 생활하기에는 부족해 각지에서 철수해 온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고 있을 때 야에야마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선 21명이 1차 이주민으로 제2차 이주민은 1년 후에 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이시가키섬에 오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이노다에 개척       

1950년 우리가 이노다에 오기 1년 전에 개척 이주민들이 호시노에 들어와 정착했습니다. 이노다에 들어온 것은 호시노보다 1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호시노에도 오기미촌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시가키섬은 훌륭해”, “땅도 좋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년 전에 호시노에 온지인을 의지하여 이주지를 찾아다닌 것 같았습니다. 선봉대로서 3명이 먼저 와서 둘러보았습니다. 오기미촌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답사하러 왔습니다. 8월경에 이시가키섬에 답사하러 왔다가 9월경부터 이주를 위한 준비를 하고 이주 희망자를 모집하여 9월경에는 이주자로 가게 되었습니다. 

호시노에는 1년 전에 이주자들이 와 있었으며 친척들도 있었습니다.   먼저 호시노에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기미촌에서 9월에 21명과 그 가족들이 출발해 한꺼번에 모두 배를 탈 수 없어 세 번에 나눠서 왔습니다. 이주민들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도착한 지 십여일 만에 9월에 이노다에 와서 10월31일까지 전 세대분 21채의 집을 지었습니다. 제재소도 없고 길도 없는 상황에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다 같이 집을 지은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집을 다 같이 만들어서 완성되면 “1번, 2번” 이렇게 집에 번호를 매겨 추첨을 통해 당첨된 번호의 집이 배정되었습니다. 

개척 기념일과부락회 결성

10월 31일에는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1951년 10월 31일을 이노다 이주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정착 후에도  50주년이나 60주년이라는 기념이 되는 해에는 기념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노다의 부락회가 결성된 계기는 말라리아 방역소로서 보건소 출장소가 생겼을때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연립주택을 짓고 그곳을 거점으로 이노다 부락이 결성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공민관이 없었습니다. 1951년에들어와서 아직 공민관 건물이 없었고 이듬해인 1952년에 청년회가 발족되면서 1953년에 청년수양회관을 만들었는데 이 회관이 지역의 거점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공민관처럼 회의를 하는 장소였습니다. 

입식지 이노다에서의 생활

이노다 취락의 모습

당시 이노다에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근처에 이노다, 호시노, 오사토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우리 세대는 평균적으로 형제자매가  6명 정도 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10명 정도 되는 집도 있었습니다. 나도 6남매입니다. 아버지는 필리핀에 이민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5명의 자식들을잃으셨는데 재혼해서 이곳에 와서 다시 5명의 자식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환생한 셈입니다. 아버지가 50살 때 내가 태어났습니다. 정말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생인지 유치원생이었을 때부터 주변 사람도 다 똑같은 옷차림에 건물도 다 같은 초가집이었어요. 또 정착 당시에는 파인애플이나사탕수수 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밭벼가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밖에도 보리나 땅콩 등의 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어 주변에 다양한 먹거리가 풍부했습니다. 파파야, 구아바 등 많이 있었습니다. 

일상 생활 속

초등학교 아이들도 일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일거리가 주어졌습니다. 가족이 다섯 여섯 명이든 열 명이든 반드시 각자 할 일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걸레질이나 요리,남자들은 장작 패기나 마당 청소 등입니다. 당시에는 가스도 없고 숯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엌에서는 연료로 장작을 썼습니다. 그래서 밭에 일하러 나가면 그냥 돌아오는 게 아니라 반드시 장작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또 어느 집이나 염소를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가정에서나 염소에 주는 풀을 베는 일은 와타쿠사(용돈벌이)를 위한 아이들의 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 6학년이나중학생이 되면 말에 주는 풀을 베었습니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여서 함께 풀을 베고 말을 타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트랙터나 경운기가 없던 시절에는 말이 중요했습니다. 이노다의 경우는 말을, 시라호나 다른 곳은 물소를 이용해서 쟁기질을 했습니다. 이노다에는 물소로 밭을 갈거나 밭을 일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노다는 대부분 말이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말로 밭을 가는작업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밭을 일구는 작업도 말로 했습니다. 

파인애플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산 안쪽까지 파인애플 밭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말로 운반했습니다. 산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말을 다루고 어른들은 파인애플을 수확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랐습니다. 말은 200kg 정도의 짐을 나를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에 200㎏을 다섯번 나르면 1t이 된다는 셈으로 파인애플을 실었습니다. 밭이 많은 집은 운반작업을 위해 말이 2, 3마리가 있었습니다. 

각각의 역할

옛날에는 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도 저녁에 돌아오면 저녁 술을 드시고 밤에는 일찍 주무십니다. 다음 날 새벽 4시쯤에 일어나 아버지가 매일같이 큰 솥에 고구마를 삶으셨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돼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냉장고는 없었지만 돼지를 식량으로 길렀습니다. 잔치가 있을 때면 돼지를 잡습니다. 돼지를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으니 소금에 절여 보관했습니다. 옛날에는 어느집에나 소금이 한 두 자루는 있었습니다. 12월 30일 즈음이면 어느 집에서나 돼지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돼지머리를눌러 잡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막대기를 들고 와 돼지 머리를 누르라고 했습니다. 누르고 있으면 그 다음에 칼을 찔러 돼지 피를 뽑았습니다. 뽑은 돼지 피도 버리지 않고 된장국이나 돼지국에 넣으면 맛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런 광경도 보았습니다. 다 먹지 못한 돼지고기는 소금에 절여 삼베 주머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한 두 달이 지나도 물에 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고기는 수치키(소금 절임) 해 저장했습니다. 자급자족을 위해 해조도 채취해서 소금에 절이고 돼지고기도 소금에 절였습니다. 

당시의 식량 사정

이노다에 왔을 당시 우물은 거의 없었고 강이 여섯 군데 정도 있었습니다. 2㎞ 범위 내에 강이 여섯 군데 정도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목욕을 할 때는 강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어머니도 빨래를 할 때는 대야를 들고 가 함께 수다를 떨며 강에서 빨래를 했습니다. 아데카 비누라는딱딱한 비누를 사용했습니다. 토지 개척이 일단락되면서 여기저기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강에 가지 않고 우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류큐 정부가 미국 민정부의 “고등판무관 자금”을 이용해 오지에도 간이 수도라는 수도를 끌어오게 되었습니다. 수도를 집 쪽으로끌어오지만 거기서 나오는 물은 많지 않기 때문에 우물도 사용하면서 간이 수도의 물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노다에 이시가키시의 수돗물이 공급된 것은 이노다에 들어간 지 50주년 정도 지난 후였습니다. 

이노다의 파인애플 산업과 에이사

마을의 생활용수

이노다가 지금처럼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을 재배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일을 해도 무엇을 심어도 잘 되지 않아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큰 태풍이 오기 때문에 태풍에 강한 작물을 열심히 찾은 것같습니다. 파인애플은 태풍이 와도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아 좋다고 해서 섬 안을 찾아다니다 보니 대만 출신인 사람이 나구라에서 파인애플을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나구라에서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만들었는지 파인애플 공장이 있었습니다. 파인애플을 심고 싶어도 개척이민으로 왔을 때는 돈이 없었습니다. 대만 출신으로 나구라에서 파인애플을 재배하던 사람은 자신의 파인애플 묘목을 한 그루 빌려 주는 대신에 돌려줄때는 두 그루를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했습니다. 묘목을 공짜로 빌려주고 묘목이 생기면 100그루를 빌린 사람은 200그루를 돌려주는조건으로 재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적중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아직 파인애플을 재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노다에서 먼서 파인애플을 재배하게 되자 오키나와 본섬에서도 파인재배는 대단하다며 오키나와 본섬 얀바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파인애플 묘목을 사러 와 파인애플 밭에는 사러 온 손님들이 가방을 들고 줄지어 서 있었다고 합니다. 묘목을 한 그루 씩 가방에 담아 가져갔습니다. 파인애플 재배가 성공해 이노다는 “1000달러 농가”라고 불릴 정도로 관광버스가 농로에 들어올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파인애플의 전성기에는 파인애플로 성공한 이노다의 농가는 “1000달러 농가”라고 불리며 각 가정에 일용직 노동자가 2~3명씩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 때 아르바이트나 일손돕기로 아이를 쓰면 초등학생은 50센트, 중학생은 1달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수 베는 일을 해서 대략 2달러, 남자는 2달러 50센트 사탕수수 수확할 때도 아침 일찍 차에 실을 때는 1시간 정도의 아르바이트로 50센트를 받았습니다. 파인애플 전성기에는 일용직 노동자가 2~3명, 많게는 5~6명 있는 집도 있었고 각 가정에 보통 1~2명의 일용직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파인애플 재배가 좋다고 해서 점점 더 많이 만들게 되면서 파인애플 회사도 4~5개의 큰 회사가 만들어졌지만 파인애플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외국에서 파인애플이 들어오자 경쟁력에서 떨어져 파인애플을 만들 수 없게 되고 파인애플 공장도 다 망해 지금은 파인애플 회사는하나도 없습니다. 

이노다는 개척하러 들어왔을 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친척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지역 공동체로서 무슨 일을 하든 협력 체제로 해왔습니다. 개척하러 들어왔을 때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전 세대의 집을 지을 때도 추첨으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도 “이것은 내 집이다”라고 고집하거나 싸우는 일 없이 추첨으로 결정하기로 하고 뽑았으면 불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20여 정보의 밭을 1정보씩 나눠 이것도 역시 번호를 매겨 추첨을 해서 당첨된 밭을 자신이 경작하는 방식으로 해왔습니다. 일치단결해 협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노다는 개척 당시부터 농로 등의 환경 정비는 1년에 두 번 주민이 총동원되어 도로 정비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이노다에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것은 이노다의 3대 행사라고 해서 아부시바레-경로회-개척기념일.

개척 당시에 얀바루, 특히 오기미촌 다카자토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타카자토 에이사”라는 전통 에이사를 주민 모두가 춤추었습니다. 개척자들은 당시 모두 청년이었기 때문에 춤을 출 수 있었고 노래와 악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주민 중에는 전통 노래와 악기를 할 수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카자토에서도 한동안은 에이사를 했었지만 그 뒤로는 고향인 다카자도에서도 에이사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노다의 우리들은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며 에이사를 하기로 하고 개척한 지 10년 정도 지났을 때 이노다를 정착한 지 10년째 되는 해에처음으로 에이사 춤을 췄습니다. 10주년에 하고 다음에는 15주년, 25주년,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10번 정도만 에이사를 했습니다. 개척 60주년되는 해에 에이사를 “제대로 남기자”'는 생각으로 모두에게 협조를 구해 열심히 보존판(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노다의 에이사는 고향 마을인 다카자토의 에이사인데 이곳 사람의 1/4정도는 미야코 출신이기 때문에 미야코의 전통 춤인 구이차도 넣어서 이노다다운 에이사를 만들었습니다. 이노다의 다카자토 에이사는 동작이 유연하고 남녀 둘이서 계속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북 하나로 모두가 춤출 수 있는 멋진 춤이라고생각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곡을 듣고 춤을 추다 보면 누구나 익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구자들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이노다에서 이것을 계승해줬으면 좋겠다는 강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60주년 때 기념사업으로 에이사 보존을 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에이사와 같은 전통 예능을 보존하는데 있어 더 화려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전통이 될 것입니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이 에이사를 이시가키(이노다)의 전통으로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야에야마의 파인애플 산업

이노다에 있는 개척 기념비는 마에하라 코이치씨와 나카무라 키에이씨가 이노다 개척에 대해 힘을 쏟았습니다. 자기 집안 일보다 지역 일을열심히 해주시고 지역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두가 이노다를 찾을 때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자”고 이곳 공원과 산은 2100평 정도의 넓이인데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 그 부지를 공원화하기 위해 5년 계획으로 정비했습니다. 

야에야마 지구에는 야에야마 향우회 “일심회”(一心会)'가 있는데 오기미촌에서는 이노다뿐만 아니라 오오토미(다케토미초 이리오모테)에도이민을 갔습니다. 오기미촌에서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할 수 있도록 야마구치 추지로씨 외 몇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일심회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오기미촌 일심회 50주년 기념식도 이노다초등학교에서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이주 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경로회나 운동회등을 함께 하는 등 매년 한 번은 교류해 왔습니다. 

전후 말라리아 방역에 대하여

개척 기념비

이주 후 1년 정도 지나자 말라리아 환자가 수백 명이나 발생하여 어떤 집에서는 4, 5명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동급생이나 또래 중에는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보건소에서 소독하는 모습은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내가 유치원부터 중학교를 다닐 때는 해마다 두 번 봄 가을 대청소를 할 때는 집 안 구석구석 불단 뒤쪽 바닥과 천장까지 소독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집들이 다 초가집이었는데 곳곳에 소독한 흔적이 하얗게 남아있었습니다. 살충제 DDT를 녹인 용액을 사용하기 때문에 하얀 자극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집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화장실, 창고, 우사, 마구간 주변에도 모두 DDT는 철저하게 뿌려졌습니다. 보건소가 가까워서 처음부터 여러 곳의 소독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정착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를 경험했고 철저한 소독이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마을 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보건소에는 많은 약이 있었고 경트럭이 아니라 당시 보건소 차량은 세발자동차였습니다. 세발자동차 뒤에는 분무기, 약 등 여러 가지를 싣고 이동했습니다. 이노다에 이주민이 오기 전에는 토미노 렌코씨라는 의사 보조가있었습니다. 야에야마 보건소는 처음부터 말라리아 방역을 철저하게 하려고 류큐 정부와 미국의 지원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서 철저하게이루어졌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철저하게 말라리아를 근절시켰으니 이것은 전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라리아 퇴치 계획을 수립한 Wheeler 박사는 대단합니다. 

말라리아 제로 달성 기념비 건립

전후의 말라리아 방역

지난해(2022년) 말라리아 석비를 세웠습니다. 류큐대학교 사이토 미카 선생님을 중심으로 관계자들이 섬을 방문했을 때 보건소가 있던 자리를 안내했습니다. 그때는 선생님들의 취지를 잘 몰랐습니다. 이노다에서는 말라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잊혀 있었기때문입니다. 사이토 미카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작년(2022년)은 일본 복귀 50주년과 말라리아 제로 달성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니 꼭이 위업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야에야마에서 말라리아가 퇴치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비석과 설명판을 설치하여 "이 지역에 비석을세워 계승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석 건립은) 마을 주민들에게 작업을 의뢰하여 자원봉사로 해주었으며 8월 20일 말라리아 관련 날에비석 제막식 기념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말라리아에 대해 조사하면서 야에야마에서 말라리아를 퇴치한 역사를 후세에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는 지금도 1억 명이 말라리아에 걸려 40만 명이 사망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에야마에서 어떻게 말라리아를 박멸해 나갔는지를 비석과 설명판을 통해 후세에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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