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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야이마에서 평화와 문화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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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0년생
  • 야마자토 세쓰코(山里 節子)

TIMELINE관련 연표

1937
이시가키섬 도노시로에서 출생.
1945
이시가키섬에서 전쟁을 경험하고, 섬 내 피란처인 산속 오두막에서 말라리아를 앓다. 전쟁 중에 가족 8명 중 어머니와 할아버지 등 4명을 잃다.
1945
오키나와 본섬에서 미국의 종합조사가 실시되다.
1952
미국 민정부가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을 설치하다.
1955
미국의 지질조사에서 지질학자 헬렌 포스터 박사의 조수를 맡다.
1956
도쿄 오지에 있던 ‘미국육군 극동지도국’에서 조사단 보고서 작성을 담당하며 지명과 고유명사 등의 확인 작업을 하였다.
1960
워싱턴에서 야에야마에서의 종합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한 군사용 보고서가 발행되다.
1963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에서 근무하며 영어 회화 수업 등을 담당. 야에야마의 예능과 문화를 도입한 사업에도 참여. (~1969년)
1985
전후 오키나와 역사 연구자들이 미국의 종합 조사가 군사적 이용이 목적이라고 지적.
2016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할머니들 모임’을 결성하고 회장을 맡다.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고등학생 시절,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에서 영어를 배웠고, 미국이 실시한 야에야마 지역의 지질 조사에서 조수를 맡았다. 절반은 민간, 절반은 군이 소유한 항공사와 류미문화회관에서 일한 후 오키나와의 평화와 환경보호 운동을 만났다. 현재는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할머니들 모임’을 돌보고 있다.

미국 학술조사단의 조수가 되다

야에야마로 온 미국 학술조사단

당시 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작은 회사에 다니면서 “영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에서 다양한 영어 프로그램이 있어 그곳에 가서 영어 공부를 했습니다. 그 무렵, 선생님으로부터 갑자기 이시가키섬에 지질조사를 하는 조사단이 오는데 그여성 단장이 조수를 구하고 있으니 여러분이 지원해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살아있는 영어를 익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를 포함해 다섯 여섯 명이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당시에는 야에야마 민정관부가 있었고 고등판무관의 대리부와 같은 기관이 이시가키와 미야코에도 있었는데 조사단은 그곳에 사무실을 빌려 조사 기간 동안 머물렀습니다. 단장인 헬렌 포스터(Helen Foster)의 인터뷰가 있어 찾아가 보니 그녀는입을 열자마자 "여러분 지질학이 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노” 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으로 업무에 대한 설명을 했을 때,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대답은 “노”였지만 나는 “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시가키섬에 온 조사단은 지질학자 두 명, 토양학자 두 명, 식생생태학자가 한 명이고, 식생의 포스버그(Forsberg)는 이시가키섬과 미야코를 겸임했습니다. 

어시스턴트로서지질조사에 동행

미야코지마는 섬이 평평해서 조사 기간이 짧았지만 이시가키섬은 2년 가까이 조사단이 가 있었습니다. 지질이라고 해도 전문적으로는 “구조지질학”이라는 분야로 노출되어 있는 암석을 찾아 암석과 암석의 경계를 따라가며 나아가는 방향에 길이나 강이 있든 없든 암석의 경계선을 따라 한길로 걸어다니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가끔 그녀가 암석 채취를 원할 때는 잠시 멈춰서 망치로 고구마 만한 크기로 바위를 쪼개서 그 기록을 적고 봉지에 넣었습니다. 바위를 담은 봉지를 내 배낭에 하나 둘씩 넣다 보니 점점 더 많아져 저녁에는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며 10킬로그램이 넘는 무거운짐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사 기간 동안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포스터 박사와서로를 부르는 명칭

우리에게는 섬사람의 성향이나 국민성 같은 것이 있어서인지 부담 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박사님을 “닥터 포스터”라고 불렀습니다. 

현지 조사를 마치고

현지 조사는 1955년 6월경에 시작해서 이듬해 10월에는 조사를 마치고 짐을 싸서 도쿄로 이동했습니다. 도쿄 북구 오지에 “미국육군 극동지도국”이라는 미군 시설이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 유명해진 곳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야전병원이었던 시설의 한쪽을 조사단이 빌려 그곳에서 현장조사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보고서 초안을 그곳에서 다 작성하고 그것을 모두 워싱턴 본부에 보냈습니다. 워싱턴 본부에서는 그 보고서를 정리하고 거기에 군사부가 조사 계약을 맺은 카운터파트 사람들이 참여해 개별적인 과학 조사를 바탕으로 군사용으로 응용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질학자, 토양학자, 식생학자들이 각각 작성한 순수한 과학 보고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모아 군사용으로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Geology of Ishigaki-shima, Ryukyu-retto'라는 것과 ‘Military geology of Ishigaki-shima, Ryukyu-retto(Ⅰ)(Ⅱ)’라는 두 종류의 보고서가 있었습니다. 그 군사용 보고서가 완성되어 워싱턴에서 발행된 것이 1960년였습니다. 이듬해인 1961년부터는 미군이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에서도 항구를 비롯해 여러 공사를 했습니다. 이시가키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매립이 이루어졌습니다. 기존 마을인 도노시로, 오오카와 이시가키, 아라카와가 있는 지역 그 남쪽에 야시마초와 미사키초, 신에이초 등이 있습니다만 그 일대는 전후에 모두 매립으로 만들어진 마을입니다. 현재 야시마쵸 근처에 인공섬이 있는데 그 첫 번째 케이슨(상자형 구조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었습니다. 1972년 복귀되는 해까지 약 11~12년 동안은 미군이 공사를 했습니다. 반환의 해에 일본 정부에 이관되고 공사가 계속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미국의 종합 조사와 오키나와·이시가키·미야코

미국 종합조사와 오키나와 본섬의 이시가키 미야코    

이 미국의 종합조사는 오키나와 본섬에서는 종전의 해(1945년)부터 약 5년에 걸쳐 실시되었습니다. 그것이 끝난 후 마셜 제도나 미크로네시아 등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충지마다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군사적 조사가 목적이라고 하지만 조사를 실시한 지 5년이 지난 동안 실시한 그종결 무렵에 조사단이 이시가키와 미야코에 왔습니다. “왜 왔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였고 그것이 이시가키와 미야코에 조사를 하러 온 이유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현지 조사 후도쿄에서의 작업

이시가키섬에서는 내가 도쿄로 갔습니다. 미야코에서는 그곳에서 조사단장 조수를 하던 사람이 왔습니다. 도쿄(극동지도국)에서의 주요 업무는 지명 확인과 지도 체크, 색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지명과 고유명사 등을 확인했습니다. 아까 언급한 조사 보고서는 순수한 과학적 보고서와 그것을 통합한 군사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그 중 헬렌이 쓴 'Geology of Ishigaki' 의 복사본 한 권을 기념으로 받아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1980년 조사를 시작한 지 30년 정도 경과한 무렵에 오타 마사히데씨와 미야기 에쓰지로씨(전후 오키나와 역사 연구자) 두 분이 기자 회견에서 미국의 조사 관련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조사 자료의군사적 이용

그 중 오타씨는 복귀 후 오키나와의 하드웨어 부분에 대한 개발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은 미군이 조사한 자료로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이용이 목적인 것은 틀림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시라호의 공항 건설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라는 기사를 보고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시라호의 신이시가키공항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때의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하필이면 이시가키섬을 미군의 손에 의한 군사화 목적으로 온 조사단에게 나는 묵묵히 봉사해 왔다는죄책감이 생겼습니다. 살아 있는 한 지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쟁 중 나는 가족 여덟 명 중 절반을 전쟁으로 잃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동기가 된 것인데 영어를 조금 익혀서 세상에 나가보니 자신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내가 있었습니다. 현재 나는 “반전평화”와 “미군기지 반대”등의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 다른 분들처럼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치거나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고 생각하면서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시라호 반대운동 때에도 그랬지만 어떤 형태로든 평화운동에 반영해서 역으로 이용할수 없을지 항상 모색하고 있습니다.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 근무 시대

류미문화회관 직원으로서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에서 근무한 것은 1963년 여름 무렵부터 1969년 말까지였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는 기획실과 도서관이 있었는데 저는도서관 쪽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의 생활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서는 USCAR(미국 민정부)가 영어 교육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유치원생부터 성인 대상의 영어 회화 수업을 담당했습니다. 영어와는별개로 스스로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지역의 춤과 노래 등에 관심이 있어 그쪽 관계자를 불러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어느 날 “나막신으로 출입 금지”라든지 “맨발 출입 금지”라는안내문이 관내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나는 그것에 반발하여 아침에 집을 나가 밤 8~9시쯤에 밭일에서 돌아와 손발도 아직씻지 못한 상태의 현지인들을 데려와 류미문화회관에서 농부들만의 노래에 조명해 사업 공연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문화시설은 류미문화회관이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 시민들의 주목도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평가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각종 행사의기획 방법

기획실과 도서관 관계자와 책임자가 연간 계획을 세우고 연중행사, 월간행사, 기간행사,  주간행사, 상설행사 등각 계획을 모두 미리 만들어 놓고그에 따라도서관과 관련된 것은 도서관 담당자가 독서동아리나 독서회 등 그런 지도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기획실은 특별히 정해진 프로그램은 없고 그때그때 직원들의 주체성과 창의성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영어 프로그램 외에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기획할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없는 분야는 일반 시민들의 협조를 구해 완전 봉사로 강의를 해주는 강사를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다들 흔쾌히 봉사를 해주시고 무용, 서예, 다도 등을 가르치는 데도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할 뿐”이라며 협조적이었습니다. 

미국 민정부와의 관계

USCAR(미국 민정부)에 대한 보고는 주간 보고서를 보냈고 야에야마 류미문화회관의 요청사항은 USCAR 보다는 야에야마 민정관부에 매주 1회씩 리퀘스트를 제출했습니다. 민정관부에서 그 요청에 따라 필요한 것을 공급, 조달해 주었습니다. 미국 측의 속박은 느낀 적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하지는 안 했지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만, 일본 문화보다는 오키나와의 문화를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점에대해 관장님이 한 번 일본과 오키나와를 떼어놓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납득이 갔으며 이면에 있는 의도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특별한 연중 행사의 날이면 문화회관 홀은 300명으로 꽉 찼습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이 연결돼 가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향토 예능을문화회관에서

야에야마에서는 오봉 명절 때 “앙가마”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내가 앙가마를 문화회관 무대로 가져왔습니다. 야에야마의 외딴 섬에 가면 3일 동안의 오봉 기간에 앙가마가 한 집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면서 조상님 공양도 해줍니다. 내가 어렸을 때 왜 우리 집에서는 안 해주느냐고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돈이 없어서 앙가마를 부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자기 집에 앙가마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을 기쁘게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번 문화회관에서 앙가마를 불렀습니다. 이에 대해 조상님을 공양하기 위한 앙가마를 불단도 있는 문화회관에서 했다는아주 비판적인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자기 집에 앙가마를 모실 수 없는 사람들도 이곳이라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런 자유가이 직장에서 주어졌습니다. 문화라면 오키나와든 미국이든 상관없고 야에야마의 문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전까지는 섬의 중요한 행사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것이 어떻게 중요한 것인지 그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당사자들 중에는 문화회관에서 저런 걸 하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것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세대 지금 바로 그 사이에서 우리 세대는 전쟁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 불과하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한 “종전”이라는 것은 맛볼 수 없는 그 상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끝내는 것도 인간입니다. 그런 가운데 일관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최근에 “남서제도라는 말은 군사 용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새삼 생각하게 됐는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곳에서 어느새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전쟁을 긍정하는 사람에게나 부정하는 사람에게나모두 똑같이 지워집니다. 그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고 항상 안테나를 세우고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오키나와라는 특수한 환경의 평화를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 젊은 여러분은 노력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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