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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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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전후 오키나와의 추모와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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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0년생
  • 미야자토 세이킨(宮里 政欣)

TIMELINE관련 연표

1928
나키진무라 고에치에서 출생.
1945
오키나와현립 제3중학교 3학년 때 오키나와 본섬 북부에서 오키나와 전투 경험.
1947
오키나와 외국어학교 졸업 후 미국 자본의 회사에 취직.
1954
외국어학교 동기인 히가시 료코 씨의 권유로 오키나와여행사 입사.
1958
10월, 오키나와투어리스트 설립에 참여하고 전무이사 취임.
1959
창업 후 주요 사업으로 본토 추모단의 방문 사업을 시작.
1967
9월부터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의 여권 발급 개시. (1호 발급자는 마쓰오카 마사야수 행정주석)
1972
반환될 때까지 추모단 방문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이 오키나와 관광의 주류를 차지하였으며, 연간 약 20만 명이 방문.
1994
오키나와투어리스트 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4
오키나와투어리스트 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취임.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미군정 아래서 탄생한 노포 여행사 ‘오키나와투어리스트’의 설립 멤버 중 한 명.

낙도의 정기 항공편 취항과 반환 전 본토 추모단 방문, 관광객 전용 버스 운행 기획, 현 내 미국인 대상 해외여행 투어, 오키나와 최초 렌터카 사업 인가에 관여하는 등 전후 오키나와 관광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오키나와 본섬 북부에서의 전쟁 체험 

학도병으로 전장에 가다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현립 제3중학교(현 나고고등학교)의 동급생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통신대 부대와 모토부에 있는 우도 부대에 합류한 그룹이 생겼습니다. 3학년에서 나 한 사람과 1, 2학년 5명이 뽑혀서 하네지에 있는 다노다케의 호향대와 방첩 교육을 받았습니다. 무라카미 대위는 호향대 대장이었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 스파이 교육을 받는 도쿄의 육군 나카노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무라카미 대위는천황 폐하로부터군검을 받을 정도로 우수했습니다. 우리 6명은 다노다케로 가서 낮에는 스파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다른 병사들은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식량운반을 했습니다. 나는 나키진 출신이라 나키진과 모토부 반도 담당이었습니다. 나키진과 본부반도 및 그 주변에서 미군의 동태를 살피고 호향대에 보고를 했습니다. 나흘에 한 번은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다노다케의 호향대에게 보고했습니다. 

호향대 해산

나고에 상륙한 미군이 하네지 쪽으로 올라와서 나키진 쪽으로도 미군이 다가와 위험했기 때문에 다노다케에 보고를 하러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즈음 호향대는 해산됐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해산 명령이 내려져서 가족과 함께 방공호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무덤을 방공호로 썼습니다. 위아래로 무덤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덤 위에 올라가서 미군을 보고 있을 때 미군이 군견을 데리고 총을 들고 다가왔습니다. 아래로 내려가 무덤 속에 숨어 있었는데 위쪽에서 기관총으로 쐈습니다. 잠시 후 미군이 무덤에서 나오라고 해서 무덤 밖으로 나갔더니거기에는 미군이 있었고 미군은 나와 가족을 수용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포로수용소를빠져나오다

당시의 하네지무라(현 나고시)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하네지무라 다이라에 있는 포로소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소에서는 미군주둔지에 식량과 통조림을 운반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끔 가족들이 수용소에 면회를 오기도 했습니다. 수용소에는 철망이 쳐져 있어 철망 안과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철망 아래 부분을 열어 옷을 벗고 철망 밑으로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숨겨줘서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지금 나키진초등학교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가까웠습니다. 누나들과 여자들은 위험하기 때문에 얼굴에 그을음을 바르고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전후 이시카와와 오키나와 외국어학교 입학

전후 이시카와 지역

이시카와에는 온나촌이나 기노자촌으로 가는 길목에 동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종전 후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집에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거기에 있는 수용소에 머물렀습니다. 남부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계속되고 있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이시카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중남부 나하 주변 사람들로 수용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대부분 미군의 배급이었습니다. 그 후 에노비에군정부가 들어서고 이시카와에 오키나와 자문회가 생겼습니다. 섬 전체에서 군정부가 지정한 회원을 데려와 이시카와의 중앙호텔에 숙박하게 했습니다. 미군이 압수한 민가를 숙소로 삼아 자문회의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자문회의 일이 있다고 해서 삼촌이 그 호텔 지배인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자문회의 사람들이 이시카와의 1구 5반이라는 곳에 있는 미군이 지은 집에 살았습니다. 세상이 안정된 무렵 이시카와고등학교가 생겼습니다내가 현립제3중학교에 다닐 때 교감이었던 히가 슈헤이 선생님(훗날 행정주석)이 이시카와고등학교에 갈 것을 권유해 주셨습니다. 

오키나와 외국어학교속성과에 입학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오키나와외국어학교가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교원 양성을 위한 오키나와문교학교도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생긴 것이 오키나와공업학교(현 오키나와공업고등학교) 그리고 구시가와에 오키나와문교학교가 개교했습니다. 문교학교 개교 후 영어 교사를 양성하기위해 오키나와외국어학교에 속성과가 생겼습니다. 마침 제가 이시카와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오키나와외국어학교 시험을 보고 다행히 합격하여입학했습니다. 오키나와 투어리스트 설립 동료인 히가시 료코도 같은 속성과였습니다. 속성과는 2개, 3개 정도의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영어 실력을 살린 일에 

공사 현장의통역 업무

당시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미국에서 많은 건설회사가 들어와 후텐마에도 지점이 있는 A&J 컴퍼니라는 토목건축회사에 면접을 보고 채용되었습니다. 공사 현장의 통역 업무였습니다. 현장에는 오키나와 출신 직원과 외국인 직원도 있었습니다. 통역으로 채용되어 후텐마 미군 캠프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A&J의 미군기지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본에서 온 공사 관련 회사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A&J도 미국으로 철수하게 되면서일자리가 없어질까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미군 군속용택시회사 입사

그때 시마택시라는 택시회사가 있었습니다. 군인, 군속만 이용할 수 있는 택시로PX(기지 내 매점)의 매니저를 하던 사람이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그 회사의 면접을 보고 나는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배차 담당으로 택시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전쟁 전에 대학 진학 등으로 본토에 갔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는데 일자리가 없어서 택시회사에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때 나는 택시회사에서 인사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장이 캠프쿠와에에 있는 DE(미 육군 오키나와 관구 공병대)에 가서 오키나와 사람이 취업할 수 있는 가장 급여가 높은 직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관리보좌관이라는 직책이라고 했습니다. B엔(미군 군표)으로 8000엔 정도였습니다. 내 월급은 2700엔 정도였기 때문에 "그럼 당신 월급도 다음 달부터8000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히가 슈헤이 행정장관의 월급은 6000엔이었습니다. 나는 행정원장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전후 오키나와 여행업과 위령단 수용

여행사 입사(오키나와여행사 시절)

당시 히가시 료코는 오키나와여행사 영업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일본항공이 1954년에 도쿄-오키나와(나하) 노선을 취항하면서 일본항공의 총대리점으로 나하여행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세상이 안정되면 여행업은 매우 유망한 업종이 된다고 듣고 오키나와여행사에 입사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공항의 체크인 업무를 혼자서 했습니다. 초기에는 나하공항에 있는 일본항공 사무실에서 했고 입국 심사 등은 퀀셋(=Quonset hut)(미군의 반원형 병영)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본토에서 오는 손님들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미국 정부의 허가가 없으면 오키나와에 들어갈 수없었습니다. 당시 본토에서 오는 여행자는 일본교통공사나 긴키일본투어리스트 일본여행 등의 여행사를 통해 오키나와 여행을 신청했습니다. 신청하려면 미국 민정부에 서류를 보내야 했습니다. 

추모단 방문(오키나와투어리스트 창업 후)

우리가 신청서를 작성하여 미국 민정부에 서류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 여행자가 오키나와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작성해 제출하는 서류도 있었지만 교통공사는 자체적으로 서류를 만들어 직접 민정부에 신청서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는데그 경우 오키나와에서의 취급처는오키나와투어리스트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면 민정부로부터 전화가 와서 신청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목적으로 오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키나와에서 친척이나 형제가 사망했습니다""그래서 추도하기 위해 지내러 온다"고 설명했습니다. 민정부가 인정해 주면 허가를 받고 본토에서 오키나와에 오게 했습니다. 

전몰자 추도

당시에는 관광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미국이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토에서 오키나와에 오는 목적은 전몰자에대한 추도였습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이 20만 명이나 됩니다. 특히 홋카이도의 아사히카와 사단 군인이 많았습니다. 오키나와에 온군인 중에는 홋카이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한 오키나와 여행 수속에 대해서는 점차적으로 오키나와투어리스트가 맡아 보증인으로서 모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통공사는 자체적으로 신청 절차를 밟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모든 신청 수속을 오키나와투어리스트에게 맡기게되면서 우리 회사가 전부 맡아 서류를 제출하게 됐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민정부에 불려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사장인 히가시 료코가 불려 갔었는데 민정부의 호출이 빈번해지면서 내가 맡아 민정부에 가게 됐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배를 이용했습니다. 당시 비행기는 달러로 지불하고 도쿄까지 편도 84달러 도쿄-오키나와 왕복이 151달러 20센트였습니다. 그렇게 비싸면 개인 월급으로는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비행기 이용자는 회사 임원 등 회사 비용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외딴섬으로 가는 항공 노선

그 당시 오키나와 본섬에서 미야코나 야에야마에는 비행기가 노선이 없었습니다. 만약 오키나와 본섬에서 미야코, 야에야마로 비행기로 가려면 오키나와의 회사가 비행기를 빌려서 비행기를 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화항공의 비행기를 대만에 가서 빌려왔습니다. 당시 중화항공은 이와쿠니~나하~대만 항공 노선을 운항하고 있었습니다. 에어 아메리카라는 회사가 대만에 있었습니다. 중국대륙에서의 전쟁 중 장제스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공군이 중국에 주둔하던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장제스의 군대에 비행기로 지원 물자를 수송하던 부대의 Chennault, Clare Lee(체널트, 클레어 리)라는 장교가 중국의 국공내전 후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가서 CAT(후에 에어아메리카)라는 항공사를 만들었습니다. 그항공사의 비행기를 전세 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운항은 정기 노선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미야코와 이시가키로 가는 노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 미국 민정부는 오키나와에 취항하는 항공사로서 에어 아메리카나 하와이 항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환됐을경우 일본항공을 취항하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에어 아메리카는 오키나와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일본항공이 운항하게 되었고 일본항공과 현지 기업의 합작회사가 난세이항공주식회사로 명명되었으며 현재의 JTA (일본트랜스오션항공) 가 되었습니다. 

회사 창업 후의 주요한 대처

오키나와투어리스트 창업 후의주요 활동

오키나와에 있는 미국인의 여행이 회사를 설립하고 나서 시작한 사업이었고 본토에서 오는 추모 여행은 미국 민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오키나와에 들어와 추모를 위해 남부 전적지 등을 다녔습니다. 일본군 장교였던 이마이 카나메씨와 우리 회사의 나카무라 겐테루가 서로 알게 되면서 어느부대가 어디서 전투를 했는지 누가 어디서 전사했는지 등의 대해 이마이 카나메씨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았습니다. 나카무라 겐테루는 이마이씨로부터 정보를 얻어 추모를 위해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을 안내했습니다. 당시에는 관광 전용 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노선버스를 빌려 남부 전적지를돌았습니다. 추모단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척이 전사한 장소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마이씨가 알려준 자세한 정보를 바탕으로 나카무라 겐테루는 추모단을 안내했습니다. 여러 차례 추모단이 오게 되면서 전사자의 무덤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각 출신 현 별로 묶어서 위령탑을 세웠습니다. 전사자가 가장 많았던 곳에 위령탑이 세워졌습니다. 나카무라 겐테루가 도와줘서 세워진 위령탑은 상당 수가 됩니다. 나는 그 당시 외국인 여행부를담당하며 플라자하우스 사무실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일을 15년 정도 했습니다. 

미군 상대여행 투어

후지산 기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해병대가 오키나와로 이동해 와서 오키나와시 아와세 주택가에 부대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미국 민정부로부터 연락이 와서 미군들을 대상으로 오키나와 관광을 통해 오키나와에 대해 알려달라는 의뢰가 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히가시 료코 두 사람이 버스를 준비해서 해병대 병사들을 데리고 섬내 관광을 시켰습니다. 히가시 료코와 둘이서 오키나와의 역사와 풍습 교육 등을 정리한 원고를 써서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원고를 만들어 읽어 주었습니다. 처음엔 영어 가이드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긴장해서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마지막에는 농담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해병대를 대상으로 한 오키나와 관광의 시작이었습니다. 

오키나와 현내 관광은 기지 내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도 했습니다. 기지 안에 있는 학교에서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았던 것은 기지 내 학교 선생님들의 해외여행이었습니다. 가데나의 장교 부인 클럽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들의 해외여행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클럽의여행 관련 위원장은 사령관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와 회장님과 의논해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등 희망사항을 듣고 내가 일정표를 작성했습니다. 장교클럽의 해외여행은 계속 내가 담당했습니다. 

관광버스 운행과렌터카의 시작

우리 회사는 여행사라서 버스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 처음에는 노선버스를 빌렸지만 나중에는 버스 회사의 버스를 빌려서 오키나와 그레이라인이라는 관광객 전용 버스를 운영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가이드도 동행시켜 관광버스를 운행했습니다. 히가시 료코가 청년회의소 회장을 역임했을때 중남미에 시찰을 가서 미국이나 중남미에서는 렌터카가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관광객이 들어오는 공항에서 차를 대기시키는비즈니스를 오키나와에서도 시작하고자 렌터카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류큐 정부로부터 버스회사도 아닌데 그레이라인이라는 버스를 운영하는것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버스 운행을 그만두면 렌터카 허가를 내주겠다는 조건부로 렌터카 허가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15대 정도부터 중고차를빌려 렌터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본토로 가는여행 수속

오키나와에서 본토로 여행하는 경우 미국 국민정부 고등판무관이 발급하는 일본 여행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그 수속을 밟아야 본토에 갈 수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갈 수 없었습니다. 여행 신청서를 모두 제출하고 미국 민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습니다. 나하시 요기에 있던 남방연락사무소를통해 신청했습니다. 나는 남방연락사무소를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아리마씨라는 담당자와 친했습니다. 오키나와 반환이 가까워져 오키나와에서일본 여권을 발급하게 됐을 때 “1호는 누가 좋겠느냐”라고 아리마씨가 물었기에 마쓰오카 마사야수 행정주석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마쓰오카 주석이 여권 1호로 발급받았습니다. “일본여행증명서”만 있으면 오키나와 사람이라도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등판무관이 허가하는 것으로 일본 정부의 여권이 아닙니다. 여행증명서는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여권이 아닙니다. 따라서 해외에 갈 때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비자가 필요했습니다. 

추모 여행에서쇼핑 투어로

전후 오키나와의 관광은 처음에는 추모단의 오키나와 방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위령제가 매년 오키나와에서 개최되고 위령탑도 세워지자 위령단관련 일은 점차 줄었습니다. 그 후에는 관광의 목적이 쇼핑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에는 반환 전이라 미국 상품이 많이 팔리고 있었기 때문에 쇼핑을 목적으로 한 쇼핑 투어가 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일본 복귀는 1972년    해양박람회는 1975년, 일본 복귀 3년 후였습니다. 그리고 해양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주로 추모 여행이 많았고 쇼핑 관광 같은 즐기는 여행은 아직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희망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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