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복귀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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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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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청년단 활동에서 출판업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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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관련 연표

1940
나카구스쿠촌에서 출생.
1959
기노자 시고 씨가 오키나와시사출판 설립.
1962
오키나와시사출판에 입사하여 『당용한자표』, 『가정의학』 출판에 관여.
1963
나하지구 이과연구회와 연계하여 교재로서 최초인 초등학생용 ‘이과노트’ 발간.
1964
『오키나와현 조국복귀 운동사』 발간. 복귀 운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
오키나와 청년단협의회 부회장 취임(3기 연속).
1965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오키나와를 찾았을 때 일어난 항의집회에 청년단협의회의 일원으로 참가.
1967
청년단협의회의 일원으로 ‘교공2법' 저지를 위한 항의 시위 참가.
1968
전국 초·중학교용 교과서 부록 『우리들의 오키나와』, 『우리의 오키나와』 발간.
1991
오키나와 시사출판 및 오키나와가쿠한 사장 취임.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유년기에 전쟁을 경험하였으며, 청년기 때부터 평화운동 참가. 오키나와의 시사 문제를 전하기 위하여 출판사의 공동경영자로서 여러 교재와 반환 관련 서적의 출판에 관여. 청년단 활동을 통하여 오키나와의 실태를 내외로 알렸으며, 과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참가. 오키나와 청년단협의회 부회장 등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 경영자로서 많은 직을 역임하였다.

평화에 대한 마음과 청년단 활동

전쟁 체험에서평화운동으로

나는 5살 때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그 전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마음이 강해져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청년단 활동에 참여

나카구스쿠촌 청년단 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부회장도 역임했습니다. 또한 나카구스쿠촌뿐만 아니라 중앙조직의 활동에도 참여하여 거기서부터다양한 활동이 시작되어 평화행진 등을 했습니다. 

파이 활동에 대한 권유와 압력

스파이 활동권유를 받다

나는 야간 고등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했습니다. 후텐마고등학교의 야간 1기생입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여기저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는 결석도 없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출석하고 오후 10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 11시에 귀가했습니다. 귀가 후에는 빨래 등 집안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의 집에서 집안일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언니가 군인 가정의 가정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 언니를 따라 기지 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오키나와 사람을 고용하는 집에 미군이 통행증을 발급해줬습니다. 지금도 기지에 들어가려면 통행증이 필요하지만 당시에도 카드 같은 패스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미군기지 내에서 일했습니다. 그 패스에는 갱신 시기가 있었는데 마침 그 당시 오키나와는 이사하마의토지 문제 때문에 미군과 주민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스파이 활동을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내 아버지가 나카구스쿠 공원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그 시기에 나는 나카구스쿠공원에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남성 3명에게 불려가서 “당신은 청년단 운동을 하고 빨간 깃발을 들고 활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길래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선거운동을 했었습니다. 남성들은 “이 사람들 중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런 정보를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으니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협조해 주면 당신의 아버지나 형제를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제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등학교 2학년인 나는 반항하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잘 얼버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순수했습니다. 그렇게 거절했더니 그 남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후 패스를 갱신할 때 "당신의 패스를 발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나에게는 패스를 발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것은 상부의 지시다” "당신은 기지에 들어갈 수 없다"고만 말할 뿐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압력이었습니다. 남성 3명에게 불려가 무서웠지만, 나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강압적인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러 곳을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에그런 제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간첩활동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오키나와 시사 문제를 전하기 위해

실상을 알리기 위해출판사 설립

19살 때는 청년단 활동에 이어 평화행진 등에 참여했습니다. 나카구스쿠촌을 떠나 회사를 설립한 것이 19살 때였습니다. 오키나와 교직원회사람들, 갼 신에이씨, 야라 조뵤씨, 헤시키 시즈오씨를 알게 되어 협력을 했습니다. 차를 타고 지정된 학교에 포스터를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회사 이름을 “오키나와 시사출판” Okinawa Jiji Publishing으로 정한 이유는 오키나와의 시사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키나와가 처한 입장이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후 상용한자표가 개정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정도 전이었을 것입니다. 딱 이 크기의 표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한 장짜리였습니다 상용한자표는 어느 학교에나 필요해서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께 부탁해서홍보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운동장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아침 조회를 했습니다. 지금처럼 교실 등 실내가 아니라 밖에서 했습니다. 그때 홍보판매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선생님들도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학생들을 모을 테니 홍보하라고 하셔서 단상 위에 서서 한자표를 펼쳐놓고홍보했습니다. 

오키나와 교직원회와의 만남

아무런 교재가 없던 시절에 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회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오키나와 교직원회 분들과의만남이었습니다. 오오시마 오사무 선생님, 헤시키 시즈오 선생님, 후쿠치 히로아키 선생님, 갼 신에이 선생님 등과의 만남이 있어서 한자 교재를 만들 때에도 감수를 부탁하기도 하고 나카야마 코신 선생님 등 추후에 류큐 정부 문교국장이 되신 분이나 선생님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셨습니다. 그런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오키나와 직원회 편집의 음악 노트나 교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학습교재 노트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과학노트를 만들었습니다. 오키나와 교직원회의 과학 연구회는 초등학교 4~6학년의 과학 학습노트를 발행했습니다. 그 후 여러 연구회에 연락을취해 교재를 만들게 되었고 사회과 동호회 선생님들을 모아서 사회과 교재를 편집하게 하기도 하고요. 하나하나 교재를 늘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사회과는 중학교 역사 분야에서 2학년용 오키나와 역사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복귀 운동에 관여

교재가 하나씩 늘어나면서 꽤 많은 교재가 만들어졌습니다. 다양한 교재가 포함됐는데 교재 출판은 모두 교직원회 연구회와의 제휴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방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은 당시의 평화 활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오키나와현 조국복귀협의회(복귀협)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으나 복귀협이나 교직원회도 『오키나와현 조국귀국 운동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발행을 위한 편집을 모두 오키나와 시사출판이 맡았습니다. 원고료는 그리 많이 들지 않았지만 저희도 비용을 부담하고 복귀협을 도왔습니다. 당시 갼 신에이씨가 복귀협 회장이고 야라 조뵤씨가 행정주석이었습니다. 그 복귀협과의 인연으로 후루겐 소우켄씨도 만났습니다. 후루겐씨는 『오키나와현 조국복귀 운동사』를 함께 각지를 돌아다니며 팔아주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분들의 소개로 우라사키 쥰씨의 저서『사라진 오키나와현』(1965년)과 이에지마의 토지투쟁 영화도 만들었습니다. 이에지마의 아하곤 쇼코씨와도 소개로 영화를 함께 만들게 되어 이에지마에도 여러 번 갔습니다. 아하곤씨를 중심으로 한 영화를 여러 번 찍었습니다. 

본토용으로 출판한오키나와에 관한 교과서

이 책은 오키나와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오키나와의 학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책입니다. 이것은 본토용으로 만든 것으로 당시 오키나와 교직원회가 중심이 되어 만든 책입니다.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출판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서 이런 부교재를 교육위원회에서 발행한다고 하면 미국행정권 하에서는 압력도 있었습니다. 이 책의 편집은 오키나와 교직원회 선생님들이 담당했습니다. 이 책에는 오키나와의 현황과 다양한 정보가 실려 있어 훌륭합니다. 오키나와의 전통문화와 염색 등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지금 읽어도 공부가 되는 내용이라서 오키나와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신문 스크랩도 있고, 평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의 군용지나 기지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어 내용이 매우 충실합니다. '우리들의 오키나와'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금 어려운 내용이며' 우리들의 오키나와'는초등학생용입니다. 슈레이문과 거리의 사진, 오키나와의 바나나, 기지에 대해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의 인쇄는 가고시마현 교직원 노조(가교조)가 맡아 가고시마에서 인쇄한 것이 시작입니다. 가고시마의 가교조에서 전국 학교로 보내져 여기저기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해 주어1만부 이상 팔렸습니다. 

다양한 압력

우리 회사에서 교재와 관련된 일은 대부분 교직원회와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선생님들은 모두 혁신 계열이었고 미군의 압력은 그다지 어려운상황은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간첩활동 같은 압력이 있었습니다. 

현 내외에서의 활동과 다양한 체험

복귀 운동에서 느낀본토와의 괴리감

나는 청년단에서 복귀운동을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조직 확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현 청년단협의회는 본토와 교류가 있었습니다. 나도 25~26살 때 도야마현과 이시카와현에 오키나와의 실상을 호소하러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청년단은 4~5명씩나눠서 각 지역으로 갔습니다. 도야마현에서는 지역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며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시카와현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아버지가 네아가리마치에서 오랫동안 단체장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지역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공민관에서 교류단 활동을 할 때 그곳사람들의  "오늘 오키나와에서 원주민들이 오는데 말이 통할까" “어떤 사람들일까”, “원주민이란 어떤 느낌일까” 그런 대화가 대기실에서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들려왔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오키나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일본의 한 현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우리에 대한 관심은 오키나와 원주민들이 온다고 해서 말은 어떤지, 어떤 옷차림으로 나타날지, 어떤 말투를 쓰는지 등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오키나와 청년단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정말한심했습니다. 그래서 교류의 장을 이용해 "우리도 당신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같은 사람, 같은 일본인입니다" "오키나와는 지금 분리된 상황이지만 여러분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오키나와가 처한 현 상황을 계속 호소했습니다. 본토에서는 그처럼 오키나와에 대해 거의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키나와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 곳인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본토는 행정뿐만 아니라 삼권분립으로보장되어 있는 것도 오키나와에서는 그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당시 청년단 사람들이나 조금 선배인 나카모토아이치씨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복귀운동에 참여

오키나와에서의 복귀 운동에서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민관에서 숙박하면서 계속 평화 활동을 했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류큐 정부에서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나카네 아키라씨나 나카소네 사토씨처럼 많은 분들이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중부지역 사람들을중심으로 특히 중부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계속 교류하면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출판이나 학교 관련의 일과는 그다지 연결되지 않았지만당시 활동의 추억은 많습니다. 본토 복귀를 요구하는 복귀 행진과 관련해  원자력수소폭탄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 에서 자주 그런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행진이나 교류 간담회 등에 참가했습니다. 지역과의 교류나 관여 등 그런 것들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항의 집회 현장에서

사토 수상에 대한 항의 집회(1965년 8월)

나하시 아메쿠에 있던 도큐호텔 건너편은 광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과 같은 잔디가 깔린 광장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신도심 지역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 광장을 이용해 우리는 청년단으로서 사토 총리에 대한 항의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릿쇼대학의 후지타 선생님이라는 분이 청년단에 대한 강습으로 오키나와에 와 계셔서 그 집회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의 집회 등의 경험이 없어서 그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 보통은 강연 등이 끝나면 해산하지만 그때는 다들 여유롭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토 총리가거기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항의하기 위해 도큐호텔 앞에서 모두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지타 선생님은 일본 본토에서의 시위 집회경험이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 자리에 기동대가 들이닥쳐 사람들을 탄압하려고 했을 때 "어서 도망가라"고 후지타 선생님이 바로 소리를질렀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도망쳐서 다행히 잡히지 않았습니다만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동대에 잡혔습니다. 오키나와에서의 시위 집회에서이러한 시위대와 기동대와의 충돌은 도큐호텔 앞과 교공2법 저지투쟁 때 입법원 앞에서도 충돌이 있었습니다. 법안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입법원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도 청년단으로서 그곳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사회운동은 주로 청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키청협(오키나와현 청년단협의회)이라는 조직이 있었고 대부분의 활동을 청년단이 중심이 되어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도 “교공2법”에 반대하여 입법원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단식투쟁 등 항의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류큐 정부 앞에서의 농성 등에도 나는 항상 참가했습니다. 교공2법 저지투쟁 때도 그 시위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오키청협의 임원으로 부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참가했습니다. “오키나와의 실상을 호소한다” “오키나와를 바꾼다” 그것을 목표로 한 활동에는 교공2법 저지투쟁 때처럼 교직원회뿐만 아니라 각 민주단체도 모두 참여했습니다. 당시에는 노조 등의 조직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청년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청년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각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같은 입장에 서서 그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사람을 본다면 상황이나 사물이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억누르면 안 되며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입장을 내려놓고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봐야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것이 압력이 되어 버립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과 아무리 써도 줄어들지 않는 것은 미소와 악수입니다. 그런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물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받은 은혜는 평생에 걸쳐서 두 배로 갚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 경영자기노자씨와의 추억

기노자씨는 매우 엄격하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할 때도 선생님들과의 협상이 있을 때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상대방의 집을 방문해 반드시 상대방을 설득하는 그런 사람으로, 모험을 하지 않고 돌다리를 두드려서 차근차근 일을 쌓아가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사훈도 기노자가 쓴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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