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미야코의 사회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 19421940년생
- 스나카와 유키오(砂川幸夫)
TIMELINE관련 연표
1952 |
류큐열도 미국 민정부에 의하여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이 설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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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이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신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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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의 직원이 되어 도서관 활동에 종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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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미국 민정부(USCAR)의 파견으로 도요대학교에서 사서강습을 받아 사서 자격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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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6월 30일, 류미문화회관 전 직원들이 해고 통지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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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에 직원으로 채용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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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에서 향토역사 강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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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미야코 향토사 연구회를 결성하고 사무국장을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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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의 6대 분관장 취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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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미야코 류미문화회관 직원으로서 도서관 업무와 사회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순회문고와 독서회, 이야기 모임, 어린이 클럽 등 여러 사업과 행사를 담당하였다.
반환 후에는 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에서 근무하였으며, 분관장도 맡았다. 미야코 향토사 연구회 설립에 함께 하였으며, 회장도 맡았다. 전후 미야코의 문화 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의 활동
류큐 문화회관 란?
류미문화회관에서는 도서관 활동과 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민정부는 이 회관을 오키나와 전체에 5개 건설했습니다. 나하 이시카와 나고 미야코 야에야마의 다섯 개입니다. 류미문화회관을 건설하여 문화활동과 도서관 활동 행사 활동을 전개하는 장을 만들었습니다. 사회교육성인들의 학습을 위해서입니다. 초중고등학생은 학교에서 공부하지만 어른들의 배움의 장은 문화회관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에서는 어느 동네나마을에도 도서관이 있어 행사 활동이나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장소로서 문화회관이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에 미국 민정부는 오키나와에도 사회교육시설인 문화회관을 건립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야코류미문화회관의 활동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문을 열었습니다. 휴관일 없이 매일 열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관장 이하 14~15명의 직원이있었습니다. 도서부와 행사부로 나뉘어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도서부는 도서의 관내 열람 업무가 중심이지만 그 외에도 순회문고와 대출문고로서지역을 순회하는 것이 업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부는 관내에서 회화, 서예, 사진, 원예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강사를 초빙하고 회원을 모집해 행사를 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문화회관의 직원은 10명 정도로 나는 다섯 개 정도의 업무를 담당했으며 보통 행사부에서는 한 명당 네 가지 또는 다섯 가지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직원 중에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영어교실을 담당했습니다. 전문적인 일은 그들이 했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회화나 서예, 사진 강좌 등은 담당을 정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특기에 따라 배정됐습니다.
나는 도서부였지만 그림책 구연회나 독서회, 어린이 클럽 등의 기획과 행사를 담당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업은 지역을 돌며 주로 공민관에서 열리는 순회문고였습니다. 공민관장에게 공민관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고 신문이나 잡지 도서 등을 행사장에 빼곡히 펼쳐 모인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게 했습니다. 지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영화 상영회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아 영화 상영회를 기대하며 모두들 찾아왔습니다. 영화는 미국의 역사, 농업과 기술 혁신 등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일본 영화도 상영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농촌 지역 사람들에게는 영화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수건을 감고서라도 끝까지 볼 정도로 사람들에게는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모든 섬 지역에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도 이동도서관이 오고 영화가 온다 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시설과 활동의 모습
류미문화회관은 언제나 열려 있고 류미문화회관에 가면 무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열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의실에서는영어 회화 교실이나 기타 행사가 항상 열리고 있었습니다. 2층 강당에서는 스퀘어댄스 클럽이 열렸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스퀘어 댄스를 추거나 레코드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미국 선진국의 문화를 도입한 영향력은 컸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컬러풀한 보드에 포스터 컬러를 이용해 일본어와 영어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것도 문화회관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문화회관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미술 활동과 원예 활동입니다. 문화회관에는 계절별 꽃과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원예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활동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틴에이저 클럽은 행사부가 담당하고 있었지만 어린이 클럽 행사부도 도서부도 직원 모두가 담당했습니다. 나는 일요일10시부터 이야기 모임을 담당했습니다. 행사장 강당에는 많은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일요일마다 개최되었기 때문에 매번 어떤 이야기를 할지 준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강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유아 교실이라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공민관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분들에게 유아교실 개최 소식을 전했더니 아이들을 모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활동했습니다. 종이 인형극이나 이야기 모임을여러 번 했습니다.
미국민정부와 류미문화회관과의 관계
미국 민정부로부터의지도・조언
미국 민정부에 키타무라씨와 무카타씨라는 미국 민정부 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달에 한 번씩 다섯 곳의 류미문화회관을 돌면서 직원들을 교육했습니다. 문화 활동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자세에 대해 도서부 사람에게는 "당신은 도서부군요" “어떤 도서관 활동으로 도서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당신은 시장을 보러 갈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도서 소개를 하고 있나요?" "지금 이런 책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홍보를 하고 있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또한 행사를 개최할 때에도 "당신은" "이 행사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나요?" "행사를 개최하는데 있어 강사가 가장 중요한데 강사를 제대로 섭외하고 있나요?""당신이 아니라 강사가 지도하는 것입니다" "강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야의 전문가를 강사로 초빙하세요" "3개월 강좌도 있고 1개월 강좌도 있고 6개월 강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강사를 초빙해서 전개해 보세요" "당신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기획을 하거나" "수강생을 모집하거나 강사를 초빙하는 것""이것이 당신의 일이고 역할입니다" "지역의 어떤 사람이 전문 강사인지, 어떤 분야의 전문 강사가 있는지" "그것들을 잘 생각해서 강사를 초빙하도록 해야 한다" “당신은 돌보는 역할만 하면 된다” 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두 분의 조언과 지도는 류미문화회관과 그 직원들에게 매우 고마웠습니다. 나 자신도 그랬습니다.
전문가로서
행사 담당자도 도서관 담당자도 모두 지역 주민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인포메이션 스페셜리스트라고 했습니다. 수강생이나 강사와 관계를 맺고 기획을 하는 역할에 대해서 인포메이션 스페셜리스트라는 단어를 키타무라씨에게 배워 나 자신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격려가 되었습니다. 내가 향토 역사 강좌를 열심히 진행하는 것이 자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강사는 자원봉사자
류미문화회관에서는 여러 행사를 개최해도 강사에게 사례금은 일절 주지 않았습니다. 강사에게는 회원들이 조금씩 내고 모은 돈으로 기념품이나답례품으로 드리는 정도였습니다.
캘린더 오브 이벤트' 발행
류미문화회관에서는 “캘린더 오브 이벤트”라는 월보를 매월 발행하고 있었습니다. 실크스크린으로 표지를 인쇄하는데 테마가 중요했습니다. 펼치면 한 달의 행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실시할 강좌명이나 행사명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발행 당번과 담당이 있어 저도 실크스크린표지 제작을 맡았습니다. 칼로 새겨서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습니다. 300부를 발행하려면 표지도 300장씩 인쇄해야 합니다. 발행하는데 기술도필요했습니다. 한 달의 캘린더로 행사명들이 세세하게 다 적혀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즐겁고 만드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류미문화회관의 “캘린더 오브 이벤트”였습니다. 관장을 중심으로 월보를 항상 USCAR(미국 민정부)에 보내 행사 내용이나 참가자 수를 보고했습니다. 그 일은관장과 부관장이 열심히 했습니다. 월보는 사무원과 특히 관장 및 부관장을 중심으로 USCAR에 보고했습니다.
도서 선정과미국 민정부의 홍보지
오키나와에 있는 다섯 곳의 류미문화회관 중 나하 류미문화회관에는 사서장이 있었는데 서사장이 책을 선정했습니다. 책을 선정하는 위원회도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그 사서장이 최종적으로 판단하여 도서를 선정했습니다. 다섯 곳의 류미문화회관에는 사서장이 선정한 도서가 각 류미문화회관의 도서관에 보내졌습니다.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됐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도 미국 민정부의 홍보지 배포 담당자가 있어 '오늘의 류큐'와 '슈레이의 빛'을 배포했습니다. 그것은 영문과 일본어로 쓰여 있고 각지역의 공민관에서 공민관장을 중심으로 배포되었습니다.
직원 연수 제도
연수제도는 미국 민정부의 기본방침에 따라 관장과 부관장을 미국에 파견하여 교육했습니다. 하와이에 있는 동서문화센터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도서부 직원은 일본 국내 대학에서 사서강습을 받게 하고 사서 자격증을 취득하게 했습니다. 미국 민정부의 예산으로 나도 사서 연수를 위해군용기를 타고 도쿄까지 갔습니다. 미국 민정부의 정책이나 교육 방침을 직원들에게 교육시킴으로써 지역 주민에 대한 봉사로 연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섯 곳의 회관의 연대교류에 대하여
다섯 문화관의 관장들이 나하에 모여 관장회의를 자주 했었습니다. 문화회관 직원들 간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도서부 담당자들의 모임도 있었고사업 담당 부서 모임도 있었습니다. 。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이 완수한 역할
미국 문화의 도입
류미문화회관은 미국이 도입한 시설이다 보니 미국의 양식과 특색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정원에도 미국의 영향을 볼 수 있었고 건물 안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설치됐으며 배경 음악도 클래식 음악을 틀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문화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 도입된, 그리고 미야코에 도입된 새로운 문화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선무공작이라고 이 시설은 미국의 선무공작을 수행하는 시설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선무공작을 좋게 볼 것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선무공작”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후 27년간 미국의 통치하에 있어서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이 수행한 역할은 미야코 지역 주민들을 위한 활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지역 주민들도 그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야코 류미문화회관은 문화도서관 활동과사회교육활동 행사활동을 전개한 장소였다고 나는 항상 말해 왔습니다. 문화회관이 있던 부지는 지금은 주차장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대문 기둥과 검은재나무의 노목이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본 복귀에 즈음하여
1972년 5월에 일본으로 반환되었는데 그 2년 전부터 복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 직원은 미국 민정부의 직원이었습니다. 미국 민정부 직원인 문화회관 직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화제가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6월 30일에 전 직원에게 해고 통지가 왔습니다.
문화회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의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8년 동안 근무했지만 류미문화회관에서 경험을 쌓은 것과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에 채용되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서 전개한 행사나 사업을 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의 사회활동이나 도서관 활동, 문화 활동이나 향토역사 강좌 등의 활동으로 연결하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개할 수있었습니다. 이것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향토역사 강좌와연구회 결성나는 8년 동안 근무했지만 류미문화회관에서 경험을 쌓은 것과배운 것이많았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됐는지는 모르지만그로부터 2년 후에는오키나와현립도서관미야코분관에 채용되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서 전개한 행사나 사업을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의 사회활동이나 도서관 활동, 문화 활동이나 향토역사 강좌 등의 활동으로 연결하여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향토역사 강좌와연구회 결성
나는 8년 동안 근무했지만 류미문화회관에서 경험을 쌓은 것과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정말 후회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유리하게 작용됐는지는 모르지만그로부터 2년 후에는오키나와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에 채용되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서 전개한 행사나 사업을현립도서관 미야코분관의 사회활동이나 도서관 활동, 문화 활동이나 향토역사 강좌 등의 활동으로 연결하여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향토역사 강좌와연구회 결성도서관에 채용되자마자 시모지 카오루 선생님을 강사로 모셔 미야코 향토역사 강좌를 열었습니다. 제1회 향토역사 강좌는 큰 호응을 얻었고 향토사 연구회라는 형태로 1년에 걸쳐 개최하는데 총 12회에 걸쳐 12명의 강사를 초빙하여 개최할 테니 함께 배우자고 권유했습니다. 사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미야코 향토사 연구회 결성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개월간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매달 다른 강사를 초빙하여 12개월간 실시했습니다. 그동안 미야코 향토사 연구회 결성을 위해 착실하게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회장이 미야구니 테이토쿠, 부회장이 오야마 슌메이 그리고 사무국장이 도서관의 사나가와 유키오 운영위원으로는 나카소네 마사지 외 8명을 운영위원으로 해서 1년 후에 미야코 향토사 연구회를 결성했습니다. 벌써 45년. 미야코향토사연구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도 4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사회 교육 활동에참여 하며
류미문화회관에서 근무한 것이 사회교육 사업과 문화활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 근무하지 않았다면 사회교육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류미문화회관에서 일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회교육 활동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