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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전후 오키나와의 미술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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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40년생
  • 이나미네 세이소(稲嶺 成祚)

TIMELINE관련 연표

1937
구 마와시무라 우에노야(현 나하시)에서 출생.
1944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동생과 함께 구마모토로 피란. 배는 쓰시마마루와 같은 선단이었다.
1946
피란처였던 구마모토에서 오키나와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구메지마에서 생활.
1947
4월, 구메지마고등학교 입학. 5월,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토만고등학교로 전학. 10월, 신설된 나하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술 동아리 입부.
1955
류큐대학교 문리학부 미술공예과 졸업. 이후 도쿄의 신주쿠 미술연구소에서 면학.
1956
나하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 이후 히가시중학교, 우라소에중학교 등에서 근무.
1972
류큐대학교 교육학부 교사로 취임.
1983
류큐대학교 교육학부 교수
1992
오키나와현 조형교육연맹 회장(~2001년 5월)
2018
오키나와현 문화공로자 표창 수상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대학 교수와 오키나와현 조형연맹 회장으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전후 미술 교육에 힘썼다. 화가로서도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상을 수상하였다. 전후 오키나와가 재건되는 상황과 사람들의 생활, 전후 학교 생활, 미술 활동, 니시무이(미술마을) 등에 대한 지식에도 해박하다.

소개지에서 고향 오키나와로

피란처에서오키나와로 돌아오다

오키나와에 도착했어. 이제 나하가 보인다"는 말에 갑판에 올라가 보니배에서 본 오키나와 땅이 허옇게 보였습니다. 얀바루 근처였다면 땅이 온통초록색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나하에 거의 와서 보았을 때 오키나와 땅은 그저 하얀색이었습니다. 섬 전체적으로 껍질이 벗겨진 것 같아 깜짝놀랐습니다. 나하 항구에 도착했을 때 모두 배에서 내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흑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한 명씩 소독했습니다.벌레를 죽이는 DDT라는 새하얀 약을 한 움큼 집어서 바지 벨트를 풀게 해서 안에 뿌리기도 하고 목 부분과 머리에도 뿌려 소독을 했습니다. DDT를 다 뿌리고 나서 모두를 트럭에 타게 했습니다. "이제 가라"고 했습니다. 행선지는 귀환자 수용소와 또 한 곳 구바자키의 귀환자 수용소와또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중으로 그곳에 가서 마중 나온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으면 그곳이 임시 숙박 장소가 되었습니다. 내 경우는 삼촌이 와 주어서 바로 따라 갔습니다.

그 당시 삼촌은 이시카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곳에 갔습니다. 전쟁 중 히야조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메지마에 계셨습니다. 나하에는 내 조부모님이 계셨습니다. 10. 10공습으로 집이 불에 타버려 아메쿠라는 곳에 있는 지인의 집을 빌려 살았습니다. 저에게는 현립제일중학교에 다니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도병으로 전사했습니다. 본섬의 우에노야에 있던 가족 중 저와 여동생은 피란을 갔고 얀바루로 피란 간 할아버지는 살아 남으시고 할머니는 병으로, 형은 전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삼촌을 따라간 후 삼촌의 주선으로 이시카와로부터 이동했습니다. 이토만에서 출발하는 구메지마행 배를 타고 나와 여동생은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전후의 교육 환경과 고등학교 생활

구메지마고등학교 입학 그 후 이토만고등학교로

아버지가 히야조초등학교 교장 관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는 8학년까지 있었습니다. 초등 7학년과 8학년은 고등학교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구메지마고등학교에 응시했습니다. 당시의 구메지마고등학교는 이토만고등학교의 분교로 1・2학년까지는 구메지마에 있었고 3학년부터는 본교인 이토만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그래서 학교 모자나 휘장 등은 이토만고등학교와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오로쿠에 있는 다카라초등학교 교장이 되면서 오로쿠에 살았습니다. 저는 전학 수속을 하기 위해 이토만에 가서 이토만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이토만고등학교 학생을 찾아 “이토만고등학교는 어디에있어요?”라고 물었더니“나를 놀리지 말아”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는 이토만고등학교 모자를 쓰면서 이토만고등학교가 어딘지 모르냐?" “학교는 벌써 시작했는데 왜 모르냐?”라고 하기에 "실은 구메지마고등학교 학생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토만고등학교로 전학 수속을 하러 왔다"고 말했더니그는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토만고등학교, 지넨고등학교, 슈리고등학교 그리고 기노자인지 마에하라인지 아무튼 몇 개 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지넨지구 등 여러 지구로 나누어 지구마다 하나씩 고등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나하에는 고등학교가 없었습니다. 그 후 1947년 10월경 전쟁 전의 덴피초등학교 터에 나하고등학교가 세워졌습니다.

당시의 학생 생활

이토만과 오로쿠는 8㎞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오로쿠의 아카미네에는 “MP하우스”가 있었습니다. 미군 군용 트럭이 이토만에 있는 군의 작업요원들을 나하로 데려오기 위해  아침이면 빈 트럭이 잇따라 이토만으로 가서 이토만에 있는 군 작업요원들을 태우고 나하로 왔습니다. 아침에는 트럭이 비어 있으니 학생들이 그 트럭을 타고 이토만에 갔습니다. 트럭 통학이었습니다. 하교 시에도 이토만에서 군 작업요원들을 내리고 빈차로 돌아오는 트럭을 얻어 타고 오로쿠까지 돌아왔습니다. 이토만고등학교 건물은 텐트였고 책상이나 의자는 없었기 때문에 상자를 찾아와 그위에 앉았고 화판을 목에 걸어 책상 대용으로 썼습니다.

신설된 나하고등학교로

그 당시 나하 거리는 모두 불에 타버린 상태였습니다. 지금 소겐지가 있는 자리에서 시내를 보면 덴피초등학교와 우에노야마중학교 건물만 보이고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교복이 없어서 미군이 처분한 옷을 다들 대충 입고 있었습니다. 모자도 지정된 모자는 없으니 각자 가지고 있는 모자를 썼습니다. 흰 선 두 줄이 있는 모자와 휘장만은 공통적으로 부착했습니다. 나머지는 각자 적당히 맞춰 입었습니다. 가죽 구두도 미군이신던 것이 꽤 많았지만 사이즈가 너무 커서 못 신었습니다. 작은 구두는 보물이었습니다 앞이 4~5센티씩 남는 신발밖에 없어서 다들 그걸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나막신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2×4라는 규격의 각목을 잘라 나막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막신을 파는 가게도 생겼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나막신만 신고 다녔어요.

미술 동아리에 들어가 미술의 길로

그 당시 고등학생들의 앞길은 캄캄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나와도 군 작업원 외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때 시마다 간페이라는 미술 선생님이 “미술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하셔서나는 미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했지만 따로 할 일이 없어서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물감이 없었으니 매일 연필로 스케치만 했습니다. 간페이 선생님은 칭찬을 잘 해주셔서 다들 열심히 했습니다. 그 덕분에 후배들을 포함해 나하고등학교에서 많은 미술가가 배출됐습니다. 어머니는 “마루쿠니마켓”에서 헌옷을 팔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물감을 사 주신 기억이 납니다. 콩 한 알정도의 작은 양의 물감을 덜어서 조금씩 아끼면서 사용했습니다. 당시에는 도화지 같은 것은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레기장에 가서 미군이 쓰다버린 노란 종이를 주워 왔습니다. 보통의 얇은 종이가 아니라 도화지 같은 노란 종이가 있었는데 거기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나 도화지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면 왠지 모르게 반들반들해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쓰던 종이는 노란색 종이였기때문에 하얀 도화지는 오히려 그리기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 기억이 납니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지역에서의 생활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입안사토 주변의 모습           

현재의 나하 신도심에는 미군 전차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캐터필러가 끊어진 전차와 차체 한가운데가 지뢰 등으로 폭파되어 구멍이 뚫린 전차와불발탄도 많이 있었습니다. 다 같이 고구마 밭에서 작업하는 중에도 불발탄이 나왔습니다. 마을의 클럽 회관에 불발탄을 가져와 쌓아 두었습니다.그 장소가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었습니다. 불발탄이 사람 키 높이로 쌓여 있었습니다. 트럭 한 대에 가득 실을 정도의 양이 모아지면 미군에 연락해서 불발탄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불발탄이 쌓여갔습니다. 불발탄이 눈앞에 가득 쌓여 있어도 아무도 두려워하지않았습니다. 여기저기에 탱크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마을 뒤편의 나하 쪽 산을 넘어가면 미군 시설이 있었습니다. 흑인 병사들이 많이 있었고 밤이 되면 여자들을 잡으러 자주 마을까지 찾아왔습니다. 다들 그게 무서워서 “흑인병사가 왔다”고 알리고 청년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몽둥이를 들고 돌을 던져 쫓아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셨지만 2×4 목재로 나막신을 만들고 어머니는 흑설탕으로 사탕을 만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부업도 하고 아와모리 소주도 팔았습니다. 작은 가게 같은 것을 만들어서 소소한 물건을 팔았습니다.

미술가를 목표로 대학에

미술가라는 목표와그 마음

오키나와는 전쟁 이후 사회적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오키나와의 부흥을 위해 힘을 다한다는 것이 우리 젊은 세대의 몫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가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좋은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류큐대학에 미술공예과를 둔 미국의 소위 사령부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의 수준이 높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이었다면 아마도 예술이 아니라 먹고 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학과를 만들고 무엇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미술학과는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미술학과를 미국은 잘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류큐대학교미술공예과로

처음에 나는 “그림을 그리는데 학문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류큐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대학에서 교원 자격증을 따라고 하셨습니다. 교사가 되든 안 되든 어쨌든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그다지 반발하지 않고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류큐대학에입학했습니다. 

대학 미술 수업에서는 매일 정육면체만 그리게 하는 뿐이었습니다. 석고상도 없고 도화지에 연필로 그리기만 할 뿐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를 게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학기 말쯤에 카파 비너스 흉상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여기저기 벌레가 먹은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처음 보는 석고상이었습니다. 숯으로 그리는 건데 그 경험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어떤 회사가 숯 등의 화구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길쭉한 숯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일반적인 가정의 형편으로 자녀를 도쿄에 있는 학교로 보내는 것은어려웠기 때문에 오키나와에 남아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군 작업원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시키려면 류큐대학에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과서도 없었기 때문에 수업 수준은 상당히 낮았습니다. 고등학교 공부의 연장과 같고 미술 수업에 쓰는 슬라이드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교과서를 펼쳐서 색채에 대해 강의를 하지만 그 책에는 명색뿐인 흑백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수업에서 이론은 귀에 들어오지만 그림에 대한감동은 상상만 할 뿐 실제로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니시무이 미술마을의화가들에게 배운다

당시 니시무이 미술촌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집에 자주 갔습니다. 후배인 오나가 지슈가 다마나하 세이키치씨 집에 자주 갔기 때문에 저도 따라갔습니다. 미술에 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고자 했습니다. 미술 서적도 많이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때문에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도 오나카 지슈와 함께 다마나하 선생님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일본 본토 미술계에 관한 정보는 선생님들을 통해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쿄의 미술 연구소에서1년간 배움

도쿄에서는 “신주쿠 미술연구소”에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누드도 그렸습니다. 위치는 지금의 가부키초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었습니다. “일본앙데팡당”이라는 공산당이 하는 앙데팡당 전시회에 나는 작은 그림 2점을 냈습니다. 그 그림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는 그때부터 유럽이나 미국의 유행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본 고유의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림은 지금은 없지만 음영을 없앤 평면적인 그림을 그린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그리는 그림의 원점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교사이자 화가로

교사이자 화가로

그때는 너무 바빠서 저녁 5시에 집에 돌아갈 수 없고 항상 6시쯤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9시가 다 된 후에 두 시간 정도 오후 9시부터11시까지는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계속 그렸습니다. “나는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9시 이후의 시간은 다 그림을 그리는데 쓰기로 했습니다. 내 작품은 실물을 보지 않고 상상으로 마음대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밤에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적인 그림의 연장선상에서 그리려면 사실적인 그림은 밤에 그릴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색도 잘 보이지 않고 그림자만 보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조명이 지금과 달라서 물감 색깔도조금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밤에 그리지 않습니다. 나 같은 경우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차례대로 그려내는 그림이라 밤이든 낮이든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그리고 대학 강사로

중학교 교사 시절에 교환교사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나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서 2년 동안 근무하고 돌아오는 제도입니다. 원래 근무하던 나하중학교로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나는 나하 지구에서 가장 작은 학교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가장 작은 학교는 우라소에중학교로 그곳에가고 싶다고 해서 부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강연 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운전기사나 통역사가 되라”는 말씀을 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높은 목표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공업고등학교 디자인과 교사로 류큐대학교 동기인 키무라 초테이와 후배인 오나가 지슈도 있었는데 그들로부터 “공업고등학교에 오지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라소에중학교에서 오키나와공업고등학교 디자인과로 옮겼습니다. 당시 디자인과는 생긴 지 얼마 되지않은 미개척 분야로 우리가 첫 학생이었던 나하고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교사의 역량에 따라 학생은 성장한다”는 생각으로 상상력을 필요로하는 수업을 많이 했습니다. 오나가 지슈 선생님이 나보다 두 달 정도 먼저 규큐대학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류큐대학에 근무하게 되면서 나도 그와 마찬가지로 류큐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일반교양 미술 관련 수업을 했습니다.학생이 100명이나 돼서 실습은 할 수 없고 강의만 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오키나와의 독자성이라는 것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키나와는 독자성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도 다르고 습관도 동남아시아계의 습관이 꽤 있고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좋은 일이지만 으스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눅들 것도 아닙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동남아시아나 화교 등의 영향을 받은 민족의 북방 한계가 일본 오키나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마토(일본) 문화의남방 한계가 오키나와입니다. 그 두 가지가 섞여 있다는 점에서 오키나와는 독특하다. 그건 특별히 으스댈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낙담할 것도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인식할 필요는 있겠지요.

작품 제작 시가장 유념하는 것

나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보고 즐거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림을 볼 때 재미있고 즐거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습니다. 그다음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세월이 지나 깨달은 것인데 일본의 화가들이 파리나 뉴욕에 가서 거기서 유행하는 것을 배우고와서 “파리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린다”며 흉내를 내는 것은 “창조를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즉 외국에서 유행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 볼 수 없는 작품을 일본에서 만드는 것, 그것이 “창조”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창조”란 푹신푹신한 것을 잡는 것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에 있는 토양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미네 카네마쓰 선생님이 말씀하신 “일본의 조형은 평면성이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슈리성을 예로 들자면 가장 긴 옆면이 정면이고 깊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미술책에 나오는 서양 교회 등의 건물은 세로로 긴 형태입니다. 그런 예를 들면서 선생님은 “일본의 조형은 평면성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학생 때였으면 “평면성은 좋지 않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입체적이어야 한다”면서 석고 데생이든 무엇이든 입체적으로 그리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평면성은 좋지 않다”고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평면성도 입체성도 똑같이 훌륭하다"이퀄이라고 할까 “위아래가 없다”라는 인식으로 내 안에 있는 평면성을 잘 살리면서" 다른 나라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좋은것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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