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복귀대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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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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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북위 27도선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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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관련 연표

1940
도쿄 가마타에서 출생.
1959
구와사와디자인연구소 야간부에서 면학.
1960
디자인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안보 반대운동인 국회 포위 행동에 연일 참가하다.
1962
구와사와디자인연구소 야간부 졸업 후 프리랜서 보도사진가가 되다.
1963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를 요구하는 제1회 해상대회를 마치고 가고시마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행진단에 참여하여 오이강부터 도쿄까지 동행 취재.
1964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를 요구하는 행진단(도쿄~요론)에 참가. 북위 27도선에서 개최된 해상대회도 취재.
1965
오키나와의 조국복귀협의회가 주최하는 ‘제1회 조국복귀행진’에 참가. 도중에 기노자촌 간나에서 미군의 소녀 역살(차에 치어 살해) 사건을 카메라에 담다.
1967
12월, 이에지마의 단결도장 기공식 취재 중 주민과 함께 미군에게 기지로 연행되다. 이후 헌병대 대령에게 심문을 받다.
1968
사진집 『오키나와 100만의 절규』 출판
2015
저서 『전장이 보이는 섬 오키나와―50년간의 취재』 출판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보도사진가 겸 디렉터. 미군 통치에 놓여 본토에서 건너오기 어려웠던 시절에 오키나와에 들어와 사진을 통하여 오키나와의 현상을 본토에 알렸다.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를 요구하는 행진과 해상대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다. 반환 전 오키나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0년 이상 취재를 계속하며 오키나와를 눈에 담고 있다.

"안보투쟁의 시대 오키나와를 알다"

안보투쟁의 시대 오키나와를 알다

1960년 전후 미일안보조약 개정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 전국에서 매일 국회의사당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국회의사당에 가면 공부가 잘 된다고 해서 디자인 학교 수업으로 국회의사당에 갔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때 처음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1954년 미국이 비키니 환초에서 수폭 실험을 했습니다. (피폭된 제5후쿠류마루의 무선 기술자 쿠보야마 아이키치씨가 피폭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63년 5월 초의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63년 4월 28일 오키나와가 분단된 북위 27도선 해상에서 본토 측과 오키나와 측에서 출항한 배가 모여 해상대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오키나와 측이 맡긴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도쿄로 향하는 행진이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가고시마를 출발해 며칠 후 후쿠오카에 도착한 후 오사카, 나고야, 시즈오카를 거쳐 그 행진단이 야이쓰에 있는 쿠보야마 아이키치씨의 묘소를 들른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이쓰 앞 오이강 다리에서 기다렸다가 그 행진단을 따라가면 그의 묘소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이강 다리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행진단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를 하고 함께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행진단과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그 행진단은 하루에 많게는 10군데 정도 길거리에서 연설을 하면서 행진했습니다. 오키나와에 대해 각지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온 청년이 2명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교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행진단에 합류해해상대회 참가

1964년에 도쿄를 출발해 일본해 쪽을 남하해 오키나와로 향하는 행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년도에 행진단 단장을 맡았던 사람(나카자와 히로야 나카노 구의원)으로부터 전화로 초대를 받아 가겠다고 하고 행진에 참가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4월 28일에 도쿄를 출발해 110일에 걸쳐  일본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규슈에 들어가고태평양 쪽에서 행진해 온 사람들과 후쿠오카에서 한 번 합류했습니다. 규슈에서는 서해안과 동해안으로나누어 행진하고 가고시마에서 합류해 함께 배를 타고 아마미오시마로 건너갔습니다. 아마미오시마도 도쿠노시마도 오키노에라부지마도 행진했습니다. 그리고 요론섬에서도 행진했습니다. 그 다음에 해상대회 전야제에 참가했습니다. 거기서 본토 측 요론섬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오키나와측은 헤도미사키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다음 날 대회를 향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배를 타고 북위 27도선 해상으로 갔습니다. 북위 27도선으로 오키나와가 분단되어 있다고 해서 로프나 철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고 양측의 배는 파도에 휩쓸리면서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해상대회는 대단했습니다. 북위 27도선은 지도상에 그려진 분단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오키나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조국복귀진에 참가

미국 통치하의 오키나와로 건너다

이듬해인 1965년 이번에는 4월 28일에 해상대회를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본토 측에서는 제3차 행진이 되지만 오키나와 측으로서는 제1차 행진이었습니다. 이전의 두 번은 조국복귀협의회로서도 본토에 호응하여 실시하기를 원했지만 조국목귀협의회는 온건한 단체로 다양한 생각을 가진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민정부의 탄압을 두려워하는 의견도 있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제3차 1965년 행진은 조국복귀협의회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져 조국복귀협의회로서 처음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1965년은 미군의 북베트남 공격이 시작되고 오키나와가 베트남 전쟁의 완전한 전선 기지가 되었습니다. 그 오키나와를 취재하기 위해 각 언론사가 도항 신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입국 허가증이라는 해외 여행 시 비자 같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허가증을 신청했습니다. 당시의 나의 입장에서보면 월간지 화보 담당 카메라맨과 신문사 보도 카메라맨 등 모두가 선배들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15~16명이 됐는데 신청을 해도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 분이 디자인학교 시절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한 달 이상 기다리고 있었는데 확인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갔습니다. 그가 접수처 직원에게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 직원이 "실례지만 목사님이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만약 목사라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시대 모든 종교의 성직자 그리고 교직자 언론관계자 이런 세 가지 직종의 종사자는 신청 접수 단계에서 심사도 하지 않은 채 카운터 아래 상자에 넣기 때문에 기다려도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담당자가 했습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내가 그래픽디자이너로 신청했더니 신청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왕 오키나와에 간다면 조국복귀행진과 함께 걸으면 오키나와의 구석구석을 보고 걸을 수 있으니거기에 맞춰서 가려고 행진단이 출발하기 이틀 전에 오키나와에 도착했습니다. 가고시마에서 출발하는 오키나와행 배는 보통 저녁에 출항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오키나와가 보이자 오키나와 출신들이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도착 후 입국심사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세관 직원이 내 카메라 가방을 보자마자 세차게 닫아버렸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습니다"이렇게 많은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오키나와에 상륙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무슨 말인지알겠는데 통과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같은 말을 다시 처음부터 반복했습니다. 세관 직원이 "당신 말은 알겠다. 눈을 감고 통과시켜 줄테니" "이 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낼 때는 주변을 잘 살펴봐야 한다" "미국인이나 미군 관계자가 없는지 잘 살피고""카메라를 꺼내서 찍고 싶은 것을 찍고 나면 바로 가방에 넣어야 한다" 세관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행진단과 함께남부에서 북부로

오키나와에 도착하고 이틀 후에 행진대에 합류했습니다. 행진단과 함께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토만의 마후니를 출발해 2일째나 3일째 되는 날에 나하에 갔다가 4일째에 나하를 출발했습니다. 지금의 국도 58호선은 당시에는 군용도로 1호선이라 하고 중앙분리대도 없이 평평하고 놀라울 정도로 넓은 도로였습니다. 기지의 활주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경우에도 비상시 활주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날 출발할 때 행진단 측에서 “오늘은 우리가 카메라를 보관하겠다”며 카메라를 빼앗겼습니다. 카메라는 홍보용 차량에 싣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행진단이 걷기 시작하면 대낮부터 불을 밝히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미군 트럭 행렬이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면서 미군 트럭을 들여다봤더니트럭 짐칸에는 무장한 많은 미군이 앉아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있었다면 찍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자 함께 있던 행진단원이 "저건 나하 군항으로 향하고 있다" "군항에서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향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카메라를 빼앗긴 그날은 "오늘은 길 양옆으로 계속 기지가 이어집니다" "기지가 많아서 위험하니까 카메라는 안 됩니다"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를 회수해 갔습니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군의 소녀 역살 사건을 카메라에 담다

행진단은 기노자촌 간나구 간나초등학교에 와 있었습니다. 행진단원 30명이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져서 선생님들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내 이름을 불러서 대답했더니 "사고로 여자아이가 즉사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부르는 쪽으로 달려가 현장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행진대원들에게 제지 당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라고 나를 부른 줄 알았는데" 안 돼요"라고 말렸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이런 현장 사진을 찍으면"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차에 치인 소녀는 조금도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경찰에게는 수사권조차 없다는 것을 전에 오키나와 사람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기에 그런 현장 사진이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됐습니다. 본토에서 오키나와 사람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기본적 인권도 없다는 것에 분개했습니다. “오키나와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주변 문제에 묻혀서 점점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현장의 사진이 본토까지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이것을 사진에 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행진단이 제지했지만"내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이 현장 사진을 찍어 두어야 한다"고 행진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행진대 책임자들로부터 "그런 사진을 찍으면 이 행진단이 탄압을 받게 될 것이다. ""행진을 계속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행진단이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서 있는 것은 트럭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뿐이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것을 다시 주장했습니다. 그때 오키나와 경찰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행진단 책임자들이 모여서 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협의를 해주었습니다. 촬영은 허락되었지만 그 조건으로 절대로 이곳 저곳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보통 카메라맨은 촬영할 때 움직이면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포지션을 찾는데 “절대로 움직이지 말아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촬영 조건을 전달한 책임자가 "내 뒤에 딱 붙어서 내 뒤에서""몇 걸음 걸어야 하는지 거리와 위치에 대해서""뒤에서 말해주면 그대로 움직이겠습니다"“카메라 위치가 정해지면 내 신호를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말해준 대로했습니다. 카메라 위치를 잡고 "여기서 찍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카메라를 꺼내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다"지금입니다"라는 말에 카메라를 꺼내 한 장 찍었습니다. 촬영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이 촬영한 필름을 즉시 조국복귀협의회에 즉시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카메라 필름을 되감으려는데 카메라 카운터를 보니 2장을 더 찍을 수 있어서 차에 치인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왔을 때와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왔을 때를 찍었습니다. 어머니가 왔을 때는 시신은 구급차에 실려 이송된 후였습니다. 나는 총 3장의 사진을 촬영하고 필름을 되감아그것을 복귀협의회에 맡겼습니다. 그 필름이 그 후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되었는지 해상 대회에서 본토 측에 넘어갔는지 전혀 알지못했습니다. 현장에는 행진단 사람도 마을 사람들도 모두 와 있었습니다. 그 여자 아이는 마을 아이였고 모인 사람들이 그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경찰이 와서 "양쪽으로 물러서서 지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이 도로는 북부 훈련장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니" "미군 차량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데도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경찰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 경찰이 할 수 있는일이 그것이 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후 미군 구급차가 와서 소녀의 시신을 구급차에 싣고 갔습니다. 우리도 북위 27도선을 향해 행진을 계속해야만 했기에. 그곳에서 작은 집회를 열었습니다. 희생된 소녀의 마음까지 본토 측에 전달할 것을 다짐하고 행진을 재개했습니다. 

행진단이 걷기 시작하자 시신이 기지로 옮겨지면 시신을 찾으러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행진단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피해자 측이 찾으러가야 하는 데다가 "이런 사유로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만, 기지 안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라는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신을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본에서 분단돼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키나와~본토 간 해상대회 참가

헤도곶으로 향하고 있을 때 또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전차가 돌진해 오고 있었습니다. 군용도로 1호선을 걸을 때는 행진대에게 카메라를 빼앗겼지만 그때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에 행진대도 포함해서 그 전차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에길을 가로질러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헤도곶에 도착했습니다. 

모닥불 대회에서 요론섬 쪽의 불이 보이자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헤도곶은 지금은 공원이 조성돼 있지만 당시에는 풀밭이었습니다. 전야제가 끝난 후의 집회에서는 트럭 3대를 나란히 세워 무대를 만들어 조국복귀협의회의 각 참가단체 대표자들이 그 무대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인사하고 싶다고 했더니 특별히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마후니에서 행진단과 함께 걸어왔다는 것 마을과 취락에서 환대를 받고 차를 대접받거나 공민관에서 묵고 식사도 대접받으며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정말 힘들겠다고 느꼈고. 그런 인권문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오키나와 현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어 큰 물결이 되면 반드시 조국 복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날까지 모두 함께 목소리를 내자고 말했습니다. 여자 아이가 눈앞에서 미군 차량에 치여 사망한 이야기를 했더니 관중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연설을 이렇게 해도 되는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연설했습니다. 

4월 28일 해상대회를 마치고 나하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메이데이인 5월 1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국복귀협의회가 주최하는 평화행진과 해상대회 보고대회가 있었습니다. 행사장에 갔더니 한 남성이 다가와서 손에 든 신문 '아카하타'에 실린 한 기사를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간나초등학교 앞에서 차에 치어 사망한 소녀의 사건 기사로 현장 사진도 실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찍은 사진 아니냐"고 하는 것처럼. 그 남자는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도쿄에 돌아갈 때까지 1주일 동안은 주변을 돌아보면서 언제 구속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나하 시내에서 지냈습니다. 그 뒤로는 촬영에도 못 나가고 인사만 하고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1965년의 일이었습닌다. 

이에지마 취재 현장에서 일어난 일

이에지마의 현 상황을 취재하다

1967년에 두 번째로 오키나와에 들어갔습니다. 지난번에는 행진 참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실상을 여러 면에서 알 수 있었으나사진을 생각처럼 찍지 못해1967년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오키나와에 가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의 조국복귀운동이 오키나와와 본토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오키나와에서 행진에 참가했을 때는 본토에서는 도쿄를 출발해 행진하는 코스와 홋카이도를 출발해 행진하는 코스 총 4개의 행진 코스에서 오키나와 반환을 호소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본토에서도 오키나와와 함께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 그 운동을 더 확대시키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오키나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사진이 필요하고 사진집을 내고 많은 사진을 전국민에게 전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필코 이에지마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이에지마는 섬의 63%가 기지였습니다. 오키나와 본섬도 마찬가지지만 전후에 주민들이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는 나하도 대부분이 미군 기지였습니다. 이에지마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마자와 니시자키 이 두 마을은 미군기지의 철조망이 없었지만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주민들이 있었습니다밭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이에지마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연락을 취했습니다. 12월 6일 단결도장 기공식에 맞춰 오라고 해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에지마로 향했습니다. 이에지마에 도착해 항구에서 올라가 오른쪽으로 들어간 곳에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아하곤 쇼코씨에게 인사하러 갔습니다. 가게 한켠에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왠 카메라입니까?" 물었더니 "내 카메라예요"라고 아하곤씨는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일을 용납할 수가 없잖아요" "미군이 멋대로 기지를 만들어서 치외법권적으로 제멋대로 하고 있어요""세계가 이를 용납할 리가 없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재판이 벌어지겠지요""그때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저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아하곤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단결도장 기공식현장에서

단결도장 기공식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준비가 진행되었습니다. 나하에서 온 참가자는  단결도장을 설계한 1급 건축사 미즈마타이라씨. 그리고 나와 카메라맨 지넨 아키라씨였습니다. 지넨씨는 류큐 정부가 발행하는 완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정부가 인정하는 카메라맨과 함께 있으니미군이 와도 괜찮을 거라고 나는 굉장히 안심이 됐습니다. 류큐 정부가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공식이 시작되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괭이질 의식이 시작되자 미군도 거기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습니다. 미군에게는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단결도장의 건설 현장은 철조망 밖에 있었지만 미군 입장에서는 영구적인 건축물의 건설을 금지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요컨대 섬의 63%를 차지하는 기지 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섬의 63%를 차지하는 기지 안에서 미군은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폭격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기 위한 폭격연습장이 있었습니다. 기공식이 끝나고 괭이질을 하려고 할 때 가데나(기지)에서 12명의 헌병이 왔습니다. 헌병들은 카빈총을 뒤로 돌리고는 4인 1조로 주민의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물건처럼 주민들을 트럭에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이에지마 사람들은 쓸데없는 저항을 하지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물건도 아니고 사람인데 하지 그만둬"라고 말하면서 나는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주민을 다 태우고 나서 헌병대는 이번에는 류큐 정부의 완장을 차고 있는 지넨 사토시씨를 포위했습니다. 우선 지넨씨의 카메라가 빼앗기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내 카메라를 풀숲에 숨겼지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헌병대가 나에게 와서 어깨에 메던 카메라는 빼앗겼고 나는 병사들에게 어퍼컷을 당했습니다. 미군은 카메라를 빼앗아 필름을 일부러 햇빛에 노출시켰습니다. 카메라를 열어 필름을 못 쓰게 만든 후 돌려주었습니다. 나는 나머지 무사한 필름만이라도 살리려고 카메라를 품에 안고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날의 사건을전하기 위해

당시에는 류큐신문도 오키나와 타임즈도 석간을 발행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하곤씨에게 "이에지마에서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두 신문사에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이유를 물자 그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직접 본 당신이 전화하라"고 하는 말에" 본토에서 온 여자가 전화해봤자 소용없다" "이에지마에서 수고하고 있는 아하곤 쇼코씨가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설득해서 전화를 하게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도 연락을 해줬습니다. 그 때까지는 미군이 제멋대로 부당한 행위를 해도 다음 날 이후에 보도됐지만 그 날 중에 오키나와 전역에 미군의 부당한 행위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북위 27도선을 넘어

미군 측 발표와오키나와 사람들의 협조

이에지마에서 나하로 돌아가 어느 석간 신문을 보니 미군의 신문 발표로 나는 지명수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지마에서 농민과 미군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졌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그런 일은 전혀 없었고, 그 보도는 잘못된 것이다"며 오키나와의 보도를 부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서 "다만 그 당시 농민이 수상한 행동을 하는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나는 미군에 의해 지명수배되어 계속 떨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미군 측의 일방적인 발표였지만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키나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오키나와사람들도 일이 커지지 않도록 협력해 주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본토로북위 27도선을 넘어

협력 체제가 갖추어져 나하공항에서 출입국 관리를 뚫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입국 허가서와 항공권을 담당관에게 내밀었는데 여행금지자라 정보자료가 와 있었습니다. 담당자는 받은 자료와 내 허가서를 꼼꼼히 대조하고 있었습니다. 담당자는 나를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들어보니 내 뒤에는 오키나와에서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인사들이 수 십명 내 뒤로 일렬로 서서 따라와 주고 있었습니다. 출입국 담당자는 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더니 나를 통과시키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습니다. 나를 놓치면 실수를 범했다고 나중에 비난을 받게 되니 담당자는 서류를 비교하며 한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뒤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담당자는 자신이 나중에 비난을 받을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습니다. 결국 나를 통과시켜주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에지마 탈출 이후 계속 쫓겨 다녔지만 마지막 순간이 특히 무서웠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는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북위 27도선을 넘기 전까지는 미군의 요청으로 비행기가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걱정이 되어 북위 27도선을 넘음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은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아하곤 쇼코씨의 대화와 비폭력의 가르침

아하곤 쇼코씨의 대화와 비폭력의 가르침

아하곤씨는 매우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의 인물이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했습니다. 나는 아하곤씨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보고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당신이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그들은 군인으로서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가는 병사들에게도 "잘 지내고 있느냐"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친절하게 말을 건네면 미군들도 “OK”라고 답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셔?" 꼭 그런 말을 했어요. 그러면 미군은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갑니다. “이런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하곤씨가 미군 병사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을 줄 몰랐던 저로서는 전혀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대단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상대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 결과  이에지마 사람들의 투쟁이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비폭력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는 가라테를 하는 사람이 많아서 무기 없이 싸우거나 방어 할 수 있는 무술이기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무서울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아와곤씨는  절대로 팔을 어깨보다 높이 들지 않을 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항의하러 달려갈 때도 농사일을 하다가 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으면 다들 괭이나 낫을 들고 달려가지만 "절대로 그건 안 된다. 거기에 두고 오시오"라고 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이에지마의 투쟁은 모두의 공감을 얻어 자신들의 농업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철저하게 심어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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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생
  • 슈왈츠(主和津) 지미 Jimmy Schwa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