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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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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교육 부흥을 지향한 오키나와의 교육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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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0년생
  • 이시카와 겐페이(石川 元平)

TIMELINE관련 연표

1938
히가시무라아자 아리메에서 출생.
1957
헨토나고등학교 졸업 후 대용 교원으로 아리메초등학교 등에서 근무.
1960
오키나와현 조국복귀협의회(복귀협) 결성.
1960
오키나와 교직원회에 채용되어 총무부에 배속. 야라 초뵤 씨의 비서 겸임.
1967
2월 24일, 교공2법 저지 투쟁 참가.
1968
첫 행정주석 선거 실시. 야라 초뵤 씨 당선.
1971
오키나와 교직원회 해산. 새로 결성된 오키나와현 교직원조합의 총무부장이 되다.
1972
5월 15일, 오키나와 시정권이 반환되다(일본 복귀).
1983
오키나와현 교직원조합 중앙집행위원,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상임이사 등을 맡다.
1991
오키나와현 교직원조합 집행위원장이 되다(~1999)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전 오키나와현 교직원조합 집행위원장. 오키나와 교직원회와 오키나와현 교직원조합 직원으로서 여러 임직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전후 오키나와의 교육 재건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첫 공선 주석이 된 야라 초뵤 씨의 비서를 맡은 적이 있는 등 야라 씨의 인물상과 그 이념을 잘 아는 인물이다.

오키나와 교직원회의 활동

오키나와 교직원회 이란?

오키나와 교직원회는 미국 점령통치하에서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오키나와의 교육부흥을 위해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공립과 사립을 포함한 교직원과 관계자를 망라한 조직이었습니다. 야라 초뵤 선생님은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전체 오키나와로연결될 수 있는 생각을 바탕으로 조직화된 교직원회였습니다. 전후의 오키나와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민주단체를 포함해 아직 힘이 약했습니다. 오키나와 교직원회는 교육 부흥을 목표로 매우 활기가 넘쳤습니다. 전쟁 피해 학교 건물 부흥 운동 등을 담당하며 열심히 활동한 조직이라는 인상입니다. 거기의 야라 초뵤라는 뛰어난 지도자는 이 조직과 현민, 아이들에게 매우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1947년에 오키나와 교육연합회라는 오키나와 교직원회의 전신이 된 조직이 이 자리에 있던 교실 두 동 크기의 막사 건물에다 교육회관을 두고 거기서 출발한 후 오키나와 교직원회가 결성된 것은 1952년 4월 1일 이 자리였습니다.  1954년 말에 교육회관이 구모지로 이전하고 미국 측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준공한 후 본격적인 교육부흥운동 등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직원들의 활동

당시에는 미국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교육부흥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기지 문제도 기지 포위에서 시작하고 특히 1956년을 정점으로섬 전체의 토지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에도 교직원들은 깊이 관여했습니다. 전 오키나와 땅을 지키는 협의회의 결성은 교육회관 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협의회의 회장이 야라초로 이에지마의 아하곤 쇼코씨가 사무국장이었습니다. 젊은 교직원은 지역 청년단에도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나도 작은 마을의 청년단 회장을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 1951년 9월 8일, 평화조약 Peace Treaty 체결에 맞춰 일본 복귀를 요구하는 서명을유엔에 전달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 역할을 청년단이 담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또 그런 기록을 나는 배워왔습니다. 

전후 오키나와의 교육 과제에 대한 대처

교육4법 민입법운동

전후 일본 본토에서는 헌법이 만들어지고 오키나와의 우리는 미국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교육기본법 제정의 요지에는 "헌법의 이상 실현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매우 납득할 수 있는 제정 이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그것이 적용되는 체제 속에 놓여 있지 않았고 이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교육기본법을 비롯한 학교교육법, 사회교육법, 교육위원회법, 교육4법으로 불리는 이네 개 법의 입법을 원했습니다. 점령 체제를 취하는 미국은 오키나와가 일본과 접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교육을 하는 것은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도 교직원이 중심이 되어 본토에서 수입하여 류큐문교도서주식회사를 1950년에 만들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 교사와 교직원회를 주축으로 하여 그리고 공제회가 대주주인 개별 교원이 주주가 되어서 류큐문교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교과서를 수입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본토의 교육기본법에 걸맞은 일을 어떻게 해서든미국이 지배하는 오키나와에서도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앙교육위원회는 지금의 오키나와현 교육위원회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현의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입법원이 있었습니다. 모두 만장일치로 교육4법을 통과시키기를 원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육기본법 전문에 “일본 국민으로서”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을 미국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이나 거부당했습니다. 보통은 입법부에서 통과된 것은 당시 히가 슈헤이 행정주석이 서명만 하면 입법이 됩니다. 그런데 히가 주석이 서명을 하지 못해 두 번이나 폐기되었습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실현된 것이 1958년 1월 10일입니다. 그 전날 야라 초뵤 교직원회장에게 고등판무관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만약에 교육4법의 입법이 세 번 거부되면어떻게 되겠느냐 야라 초뵤 회장의 생각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교육4법이 거부될 경우 철저하게 투쟁하겠다”고 했습니다. 교육4법이 입법화돼야학교 현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사절은 야라 회장의 의견을 고등판무관에게 보고했습니다. 교육4법의 입법화는 그 다음날에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이 1958년 1월 10일에 공포되었습니다. 미국이 행정권을 가진 오키나와에서 일본인으로 교육을 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의무교육비 확보를 위해

1965년 일본 총리로서 처음으로 사토 총리가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그 전년에는 의무교육비 획득 기성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일본 헌법에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오키나와 아이들과 교사들은 그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정부에게도 요청했겠지만 의무교육비의 국고 부담 그리고 교원 급여의 반액 부담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교과서 무상 배포입니다. 이것들을 사토 총리가 왔을 때 의무교육비 획득 기성회장으로서 야라 초뵤가 청원했습니다. 야라 초뵤 교직원회 회장 및 기성회 회장의 청원에 대해 “예스”라는 답변을 받아 이듬해부터이것이 예산화 되어 교과서 무상배포 등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전쟁피해 학교건물 부흥모금운동과“사랑의 교구"

1952년 교직원회가 중심이 되어 오키나와 전쟁피해 학교건물 부흥촉진 기성회를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구상을 전국에 어필하여 막대한 모금을모으려 했습니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현민회 그리고 오키나와와 인연이 있는 많은 고명한 학자들도 야라 선생님과 인연을 맺고 있었습니다. 남방동포원호회 사무국장을 지낸 요시다 시엔씨와 와세다대학 총장을 역임한 오하마 노부모토 선생님과 연락을 하면서 본토 사람들도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홋카이도에서 가고시마까지 6개월간의 모금 활동으로 약 7000만엔 가까이 모금됐습니다. 오키나와현내에서도 모금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본토에서 연락을 받아 모금을 받으러 가려고 했을 때 받으러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류큐열도미국 민정부)이 못마땅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본인에게도 들었지만 야라 초뵤가 호소한 것 중 하나는 오키나와 전투로 잿더미가 된 학교의 교육 여건 정비에서 가장 중요한 학교 건물이 마구간과 같은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을 담은 앨범을 본토로 가지고 가서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학교의 상황을 호소하는 것과 동시에 하루라도 빠른 일본 복귀를 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나의 주장이 미국을 자극해 야라를 오키나와에서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통고가 세관 등에 전달되면서 나의 도항 허가가 나지 않아 모금된 자금을 받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품 조달은 허가되었기 때문에 오키나와 교직원회가 각 학교에 필요한 교육 기자재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학교의 요청은 우선 도서, 오르간이나 피아노 뜀틀 등체육 용품 과학 실험기구 등이었습니다. 황동으로 만든 종이 필요하다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모금 사용 용도가 교육기자재로 변경되면서 전쟁피해학교건물 복구운동에서 “사랑의 교구”로 바뀌었습니다. 사진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교육회관의 설립 이념과 역할

교육회관의 변천과위령에 대해

구모지의 교육회관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교육회관은 전후의 모든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담겨있는 건물로 1954년부터 잘 버텨오다가 재작년(2021년)에 철거되었습니다. 교육회관의 설립 이념은 “제자를 전쟁터에 보내지 않겠다”는 예전과 같은 다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족과 전쟁 경험자와 단체가 이토만의 마부이에 많은 비석을 세웠습니다. 교육 관련 전몰자의 비석을 세우자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후 초기에 이러한 위령탑과 비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단계에서 구 지자체별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오키나와에는 12개 지구 교직원회가 있고 현지의 각 학교를 통해서 직접 조사에 나서 교육 관련 전몰자에 대한 조사를 했고 그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교육 관련 전몰자의 위령제는  1952년 다이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모지의 교육회관과위령실 설치

오키나와에서는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분을 불단에 모십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서 사범학교 교장선생님까지 많은 전몰자를 모시는 방법을 생각했을 때 교육회관을 짓고 그곳에 위령실을 만드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위령비를 밖에 세웠을 경우 매일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식 불단이라면 아침저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건설의 목적 중 하나는 맹세입니다. 반전 평화의 거점으로서 세계에 알리고 싶은 강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미국이 교직원회 활동을 방해했기 때문에 교직원들이 결집하는 거점으로서 구모지의 교육회관이 건설되었습니다. 그 회관은교직원회만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1956년 온 섬마을 투쟁 때는 준비부터 결성대회까지 강당에서 했습니다. 당시에는 회관 등의 시설이 적었던 탓도 있겠지만 이른바 교육과 어린이, 현민과 관련된 과제 실현을 위해 오키나와 교직원회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오키나와 교직원회의 역사와 발자취는 오키나와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회관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반성과다짐의 장으로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21개 학교의 “모든 학도의 비”도 마부니에 세워졌습니다. 반성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을 전장에 내보낸 것입니다. 이 곳에서도 히메유리 학도대에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히메유리 학사의 흔적의 일부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전장에 보낸 과거의 반성과 함께 현재는 “제자를 전장에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의 장소로 적합한 곳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새로운 각오로 이 자리에서 반전평화교육에서 우리가하지 못한 일을 그것을 짊어지고 아이들의 생명, 그리고 현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 뜻을 이어받아 열심히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교공2법이라는 것은 두 개 법을 가리키는데 하나는 지방교육구공무원법과 또 하나는 교육공무원특례법입니다. 

교공 2법 저지 투쟁 현장에서

교공2법 저지 투쟁

또 하나는 교육공무원특례법입니다. 이 두 개 법을 “교공2법”이라고 합니다 내 기억으로는 본토에서는 근무평정 반대 투쟁이 언론 등에 보도되어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거기서 전국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첫 째로 파업 등의 쟁의행위를 금지한다는 점 두 번째로 근무평정, 즉 근무평정을 한다는 점 세 번째는 정치행위를 제한하는 점이었습니다. 그 중 오키나와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정치투쟁을 금지하는 부분으로 처음에는 금지가 아닌 “제한”이었지만 그것이 결국은 “정치행위 금지”로 바뀌었습니다. 몇 년에 걸친 투쟁 속에서 한때는 “민주적인 교공2법이라면 괜찮지 않겠느냐”라는 의견도 내부적으로 있었지만 미국의 뜻에 따라 입법하려는 것이었고 당시는 마쓰오카 행정수석이었고, 집권당은 자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를 강행하려 했던 것입니다. 

1967년 2월 1일 국회 개회 때 고등판무관이 와서 연설할 예정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교서를 받고 류큐에 대한 미국의 시정방침 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입법부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 앵거 고등판무관이 미국 국민정부청사 안에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입법부 주변의 상황을 봤을 것입니다. 그 때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앵거 고등판무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공2법 저지투쟁이 고양되어 결국 1967년 2월 24일 교공2법안 채결 저지를 통해 폐안 협정을 얻어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전역에서 온 경찰관 약 900명이 모였습니다. 

입법부 앞에서의 시위 활동(1967년 2월 24일)

시위대가 막아선다면 확보하면 강행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 단계인 새벽에는 특히 여성 교사 등은 기동대에 의해 강제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사실 남편이 경찰이고 아내가 교사인 사람도 있었고 스승과 제자 관계도 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문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입법부 앞 라디오 생방송은 마치 야구 경기의 중계방송과 같았습니다. 방송을 들은 많은 일반인들도 참여해 최종적으로 2만 5000명이 됐습니다. 본섬 주변의 교원들이 다 모여도 90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2만 5000명이 모였습니다. 현 노동조합 협의회를 비롯해 민주단체와 정당 관계자들도 많이 왔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일반인들도 많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항의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경찰이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영차 영차” 외치며 서로 밀고 당기면서 파도치듯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위대가 뒤로 물러서는 힘으로 경찰대를 차례로 뽑아내드디어 시위대와 맞서는 경찰대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승부는 국회 밖에서 결정 난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상황이 계속되고 저녁이 되어도 모두들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폐안을 쟁취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명문화된폐안 협정 몇 월 몇 일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폐기한다는 협정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귀 운동과 관련해 교직원회를 억누르려고 하던 미국의 목적이 빗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오키나와의 상황에서의 역사적 의미는 큽니다. “교공2법 투쟁에서 저지하지 못했다면 어떻게되었을까”라는 말처럼 교공2법 저지 투쟁이 1972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에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가 『교공2법투쟁사』에썼습니다. 앵거 고등판무관은 1968년 2월 1일 판무관연설에서 행정주석의 공선을 인정할 것을 밝혔습니다. 그때까지 주석공선 임명저지투쟁이라는 피를 흘리는 엄청난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런 투쟁 없이 전후 처음으로 현민에 의한 주석 공선 직접선거가 실시된 것이 교공2법 저지투쟁 이듬해의 일이었습니다. 

교직원 조직이해낸 역할

교직원이 추진한 방안은 현민과 어린이들의 인권을 옹호하고 토지투쟁 등 현민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재정력도 없는 류큐 정부가 교원의 처우 개선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개선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민정부 측은 “민정 제일주의”를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민정이 우선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 우선입니다. 군용도로 1호선(현 58호선)이 상징하듯이 민정제일주의라고는 하지만 교육에 대한 지원은 미흡했습니다. 일본 헌법에 의무교육이 무상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오키나와에 전혀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의무교육비 확보를 위해 교과서 무상 배포와 교원 급여의 반액 부담 등 구체적인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는 이듬해부터 예산이 책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교과서 무상 배포를 일반 현민과 교직원들도 가장 반겼습니다. 복귀 전인 1965년, 미국 지배하 27년 동안에 실현된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리고결집한다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직원 조직이 이런 금자탑을 여러 개 쌓아 올린 것입니다. 어쨌든 미국 점령통치하에 있으면서 그것에 저항하는 운동을 해온 단체였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또 현민 여론이 지지해 준 것이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야라 아사나에씨의 인물상과 오키나와에 대한 생각

야라 초뵤씨에 대해

야라 선생님은 “다시는 현민이 국가권력의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교직원회를 만들어교직원회 회장을 맡아 행정주석과 오키나와현 지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후원회 사무국장도 겸임했습니다. 야라 선생님이 말년에 나에게도 당부하신 것은 “복귀의 내용을 쟁취하는 것은 너희의 중요한 책무”라는 것이었습니다. 복귀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핵도 기지도 없는 오키나와입니다. 야라 초뵤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거의 없지만 이 기회에 말씀드리자면 야라 선생은 물리 선생님입니다. 전쟁 전에는 오키나와 현립제2중학교 등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였던 대만의 타이난제2중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으시고 실적을 인정받아 타이난제2중학교교사에서 타이베이사범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야라 선생님은 차별이 없는 인성교육을 전쟁전 오키나와에서도 청소년 교육을 담당했던 대만에서도 실천해 왔으며 그후 행정주석이 되고 오키나와현 지사가 되었습니다. 야라 선생님을 모셨던 우리와 대화할 때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사시사철 오키나와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평화헌법 교육기본법을 바탕으로 복귀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단순히 야라 선생님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공통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메유리 학도 인솔교사였던 나카소네 세이젠 선생님을 비롯해5~6명의 교육계 대표들이 본토의 교육 시찰을 다녀왔습니다. 교육시찰을 다녀온 보고회로서 교직원회 결성 전인 1952년 1월에 제3회 교장회의를 열었습니다. 나카소네 세이젠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여러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후 민주적 교육체제 속에서 배우는 본토의 아이들의 상황을 전 오키나와 제3회 교장회의에서 보고했습니다. 그때 야라 초뵤는 불을 뿜는 듯한 연설을 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야기라는 교장 선생님이 이 열기에 휩싸인 상황을류카(오키나와 전통 시가)로 읊었다고 합니다. 야라 선생님이 류카를 굉장히 소중히 여겼습니다. 주석 공선 때에도 이렇게 읊조렸다고 합니다. "만약 미국이 (우리의 요구를) 듣지 않는다면" "오키나와를 모두 짊어지고 조국(일본)으로 건너가자" ”복귀의 내용을 쟁취하는 것은 여러분의 소중한책임”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1960년에 들어와 그 때부터 야라 선생님을 모셨지만 복귀에 대한 그 마음은 오키나와 교직원회에 고스란히 계승됐습니다.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자신의 원점에 있는 것

그것이 내 나름의 하나의 원점입니다. 그리고 오키나와전을 겪은 사람들이 헤노코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면 역시 오키나와전 경험입니다. 전쟁 경험자는 점점 줄어들어 인구의 10프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전세누아와리 와시테 와시라리미” (전쟁의 슬픔은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치누유니나틴 이노치두타카라” (어떤 세상에서도 목숨이 보배다)이것은 세기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치나 (오키나와) 적인 평화사상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 활동의 원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경험자로부터 배우고마음을 잇다

그 수는 줄었지만 오키나와전 경험자들이 아직 건재하기 때문에 그 분들의 말을 많이 들었으면 합니다. 민중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오키나와현 평화기원자료관입니다. 그 밖에도 히메유리 평화기원자료관이 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들과 시설에서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의 생각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을 포함하여 오키나와의 아이들이 근현대사를오키나와의 관점에서 다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세에게물려주는 것

전후부터 계속되는 오키나와의 과제에 대해 우선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용한 시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말로 “우치리”라고합니다. 꺼지지 않도록, 불씨를 없애면 안 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다 “굴욕의 날”에 대해 오키나와가 일본으로부터 분리된1952년 4월 28일은 전 국민이 “굴욕”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전쟁의 총괄이나 개괄 정도는 해서 후세에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오키나와와의 관계에 대한 답도 나올 것입니다. 당시 자민당 노나카관방장관은 “정부의 책임으로 오키나와전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떠오르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총괄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일본은 아직 총괄하고 있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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