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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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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엔지니어로서 전후 오키나와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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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40년생
  • 엔도 야스오(遠藤 保雄)

TIMELINE관련 연표

1924
(한반도 북동부)라남에서 출생.
1942
4월, 남만주공업전문학교 입학. 같은 해 근로동원으로 발전소(남만주철도 계열)에서 일하다.
1944
징병검사에서 갑종으로 합격하여 공병으로 판정 받다.
1945
9월, 남만주공업전문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10월, 무선기 제조회사 ‘기쇼무’ 입사(소련군으로 관할 변경)
※1947년 3월에 휴직(그대로 귀국)
1947
3월 말, 대련에서 일본으로 귀환(4월 초에 고향인 센다이로)
1948
8월 센다이에 위치한 니가타케 캠프(캠프 심멜페닝)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근무
※1950년 6월에 퇴직
1950
10월, 전기 관련 기술자로 오키나와에 건너와 라이컴(미군)의 스태프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1953
(마루야마 건축사무소 소속 간접 고용 형태로)캠프 구와에의 코프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송전시설 설계 등을 담당.
※1958년 4월 미국에 직접 고용(federal employees)되다.
1970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기 전 고쿠바구미 전기설비부에 부장으로 입사.
(1983년 정년 퇴직 때까지 근무)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엔지니어로서 오키나와에 건너와 전후 오키나와의 전기 인프라 사업에 관여하며 재건에 힘썼다. 1951년부터 1970년경까지 오키나와의 모습을 8밀리 필름 카메라로 촬영하며 일과 축제, 오키나와 내 여러 장소, 행사, 가족 풍경 등 많은 영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만주에서의 생활과 태평양 전쟁

일본 통치시대의 라남에서 태어나다

1924년 한반도 북동부 라담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육군 제19사단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한 도시 안에 4개의 연대가 있어 마을의 절반이 군대였습니다. 연대가 마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군대 나팔소리에 잠을 깨는 환경이었습니다. 도청 소재지였기 때문에 관공서와 관리들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육군 군납 상인으로 군대를 드나들며 여러 일을 맡아 했습니다. 

만주에서 전기공학을 배우다 태평양 전쟁의 시대로

라남의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의 관동주 대련에 있던 남만주공업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후에 설립한 국책기업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가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만철은 “군대 말고는 다 갖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러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석탄 굴삭 회사 등 만철은 큰 회사로 직원 자녀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주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내가 졸업한 학교가 대련에 만들어진것도 장차 만주를 비롯한 대륙에서 활약할 수 있는 공업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전기공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나는 1924년 2월생으로 졸업했을 때는 군대에 가는 적령기였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1944년에 징병검사를 받아 나는 공업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징병검사는 갑종에 합격해 공병으로 판정 받았습니다. 나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간부후보생을 목표로 했습니다. 전쟁 중 나는 근로동원으로 큰 변전소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8월 15일에 중대한 방송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 2층에서 소장님들과 함께 기립한 자세로 라디오를 청취했습니다.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종전 칙령이었습니다. 종전이 되었기 때문에 변전소 소장이 "노동동원은 이제 해제한다"고 했고 우리는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졸업한 것은 1945년 9월입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종전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대학생이나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은 징병제로 입대했지만 기술계열의 학생과 의대생은 졸업할 때까지 징집을 연기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원래 나는 9월에 졸업하고 입대할 예정이었지만 직전인 8월15일에 종전이 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만주에 소련군이 진주하다

대련에는 아마 9월 22일에 소련군이 진격해 와서 탱크와 트럭이 큰 소리를 내며 큰길로 들어왔습니다. 도시 전체가 소련군 병사들로 넘쳐 소련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기쇼무선” 이라는 무전기나 방송국 장비 등을 제작하는 비교적 큰 제조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입사하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여순에 앞으로 큰 방송국을 만들기 위해 소련의 설비를 만드는 일을 우리 회사가 맡았습니다. 그런 기술을 가진 기쇼무선은 소련군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련군이 발주한 일로 월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월급은 당시 소련의 군표로 받았습니다. 

1946년 12월부터 대련에 살던 일본인을 위한 귀환선의 운항이 시작됐습니다. 우리 기술자들은 소련군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발이 묶였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의사나 기술자와 만철에서 필요한 사람은 가능한 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철수는 늦어졌고 간호사와 의사 등의 귀환은 이듬해로 미뤄졌습니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먼저 귀환하고 기술자들은 나중으로 미루어졌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3월말 마지막 배가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휴직계를 내고 일본으로 귀환했습니다. 

만주에서 본적지인 센다이로

만주에서 일본으로 귀환

3월 22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이이치 다이카이마루라는 5000톤급 화물선을 타고 대련을 출항해 2박 3일만에 사세보의 하리오섬에 도착했습니다. 입국 수속이 끝난 4월 2일쯤에 드디어 센다이역에 도착했습니다. 센다이는 종전이 되기 전인 6월, 7월쯤에 중심부가 공습으로 완전히 불타 버렸습니다. 

본적지인 센다이로 돌아가 미군 캠프의 엔지니어가 되다

센다이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더니 걱정한 어머니가 신문광고를 보고 센다이에 있던 주둔군(미군)이 전기 기술자 엔지니어를모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센다이 교외의 고타케라 는 지역에 미군의 캠프 심멜페닝 (Shimmelphenning)이라는 기지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일본 해군의 시설이 있었는데일본 해군이 떠난 후 미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기계 수리를 하는 미군의 유지관리 부대가 있었습니다. 일본인 엔지니어가 필요하다고 해서 일본 사무소를 통해 주둔군 요원 모집에 지원하여 채용되었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미국 통치하의 오키나와에

한국전쟁을 계기로 센다이에서 오키나와로

1950년 5월 말경부터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같은 해 6월에 센다이에 있던 미군은 절반은 조선으로, 절반은 오키나와로 이동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센다이에서 미군이 떠났기 때문에 니가타케의 캠프 심멜페닝의 일거리도 떨어져 당연히 폐쇄되고 나는 퇴직했습니다. 

니가타케 미군기지 근처에 일본인 직원이 많은 캠프 파울러(Fowler)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대장이 "일본 엔지니어들은 매우 우수하다"며 "우리가 조선이나 오키나와로 갈 텐데" "함께 와서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캠프 파울러의 대장이 골프 동무인 센다이 출신인 야시마씨라는 한 회사 사장과 상의하여 회사를 만들어 일본인 직원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곧바로 야시마씨는 센다이에서 회사를 만들고 젊은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집해 1차로 약 30명이 6월에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소문이 근처에 있는 우리 캠프 심멜페닝에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야시마씨 회사에 가서 "나도 오키나와에 가고 싶다"고 신청했습니다. 10월 초순에 출발하는 2차 모집의 안내를 받아 그 시기에 맞춰 9월 30일 밤에 약12명이 센다이에서 출발했습니다. 

도쿄에 가보니 GHQ 근처에 미군 수속 사무소가 있었습니다. 수속을 하는데 이틀 정도 걸렸고 다음날 새벽에 그 그룹이 하네다 비행장에 가서 미군 사무실에서 수속을 마치고 후쿠오카의 이타츠키 비행장을 경유하는 오키나와행 수송기를 탔습니다. 해가 질 무렵 가데나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가데나에 도착한 후 미군 트럭을 타고 나하까지 가서 민정부 사무소에서 입국 수속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키나와에 올 때 출장명령서를 받고 도쿄에서 왔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그런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나하에서 입국 수속을 하고 다시 트럭을 타고 가데나로 돌아갔습니다. 가데나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자탄에서 좀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라이컴입니다. 

라이컴의 엔지니어로 오키나와 생활을 시작하다

라이컴은 RYCOM. 일본어로 말하자면 미군의 류큐방면군입니다. . 전쟁 중 류큐제도에 공격해 온 미군의 명칭이 류큐군이고 영어로는Ryukyu's Command인데 그것을 미군은 약칭으로 라이컴(RyCom)이라 불렀습니다. 그 사령부 직속으로 유지관리를 하는 담당관이 있었고 그담당관이 있는 엔지니어 사무실에 나는 입소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실의 절반은 원래 일하고 있는 미국인 엔지니어들이었고 부족한 부분을 일본 엔지니어로 채웠습니다. 

당시에는 미군도 온지 얼마 안 됐고 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사무실은 전부 가설 판잣집이었습니다. 전기도 여기저기 이동식 디젤 발전기를 설치해 그것으로 전기를 발전하고 미군 시설에 배전하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드디어 전봇대에 전선을 연결해서 배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막 왔을 때 라이컴 지역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이동식 대형 발전기가 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미국 특유의 고전압인 2400/4160볼트로 전봇대를 세워 배전을 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우리는 시설 개선을 목적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지프를 제공받아 현장에 나가 조사하고 어느 부분을 고쳐야 하는지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조사차 돌아다닌 곳은 미군이 주둔한 곳으로 우리가 가서 확인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런 가설 시설을 철거하고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 이전하기 위한 조사와 설계를 했습니다. 나는 전기 전문직으로 전기 관련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기지에서 일하면서도 달러를 쓰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 없었습니다. 월급은 달러로 계산됐지만 엔화로 환산해서 받았습니다. 당시 B엔(미군 군표)이 있었습니다. 

나하의 덴피 초등학교 안에 미군 사령부가 있었고 그 안에서 전기 고장이 난 부분이 없는지 점검하던 중 방송국을 봤습니다. 그것이 “KSAR”이라는 방송국이었습니다. 점검을 위해 들어간 사무실의 한 방이 방송국이었습니다. 인연이 있어 가비라(조신씨, 조세이씨) 형제와 친해졌습니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방송국에 많은 음반이 있었습니다. 일하러 갔을 때마다 명곡들을 들려줘서 많이 친해졌습니다. 

한국전쟁 휴전으로캠프 구와에 근무 이동

오키나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 2년 후 맥아더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 본국의 의도에 따라 한국전쟁은1953년에 휴전이 되고 라이컴의 미군도 조직이 변경되면서 라이컴 엔지니어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조만간 저도 센다이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미군 조직에서 라이컴이 폐쇄된 후 미국인들이 “구에”라고 부르는 캠프 구와에에서 건축설비 설계를 하는 SOM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전기설비와 기계설비의 설계는 “로저스 엔지니어”가 하청으로 맡고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라이컴에서 일본인 스태프들의 귀국하지 않도록 하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도쿄에 있는 설계사무소 “마루야마 건축사무소”가 몇 명의 일본인 엔지니어를 “SOM”에 파견했었습니다. 마루야마 산하에 들어가 계약하지 않겠느냐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결국 마루야마를 통해 캠프 구와에에 취직하게 됐습니다. 

구와에는 기술부대 엔지니어링 부대였습니다. U. S. army corps of engineers와 같은 “corps”는 “사단'”나 “군단”의 뜻으로 corps of engineers는 “공병대”를 의미합니다. 구 일본군과 달리 미국 공병대는 일종의 하청업체와 같은 존재로 해군이나 공군 사무실에서 필요한 설비나지역의 건설을 발주합니다. 코프 엔지니어가 설계를 하고 그것을 업자에게 발주합니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의 경우, 전기 공사를 예로 들자면 제가오키나와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코프 엔지니어가 마키미나토 발전소를 발주하고 일본 업체가 입찰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4만6천 킬로와트출력의 발전소를 마키미타토에 건설했습니다. 그게 1952년 또는 1953년경였습니다. 발전소가 생기면 송전선이 필요합니다. 6만 볼트 전압의 송전선 공사를 히타치공사가 맡아서 마키미나토 발전소에서 나하나 가데나 등지에 6만 볼트 철탑 송전선을 건설했습니다. 내가 왔을 당시 히타치공사의 건설회사는 라이컴 근처에도 철탑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미군 직장에서 지역 건설 회사로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로고쿠바구미 근무

사토 닉슨 회담에서 2~3년 안에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 무렵 미군은 미국 행정권하에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게 되면서 캠프 구와에의 코프 엔지니어 오키나와 지구의 폐쇄가 결정되었습니다. 나는 실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하던 전기과를 관장하던 부서에서 오키나와 사람과 일본인을 매우 친절하게 잘 챙겨주었던 설계 브랜치 치프인 동갑내기 로이 쉴드가 현지의 건설회사 고쿠바구미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고쿠바구미에 저와 같은 남만주공업전문학교 출신인 선배 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선배가 나를 잘 봐줘서 불러 준 것이었습니다. 미국통치하에 있던 오키나와의 행정권은 1972년에 일본으로 반환됐는데 이미 1970년 말에는 오키나와 반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나는 70년 말에 미군 직장에서 고쿠바구미에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가 반환되기 전에 나는 고쿠바구미 직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쿠바구미도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하면 본토의 대형 건설회사들이 오키나와에 속속들이 와서 일감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경험이 풍부한 본토 출신자가 필요했고 내가 거기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죠. 

지금까지의 일을 되돌아보며

전쟁 중 패색이 짙은 전투에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친구가 미군 공습으로 목숨을 잃고 전쟁 후 친구가 소련군에게 총살당하는 등 여러 가지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운 좋게 목숨을 건져 귀국할 수 있었지만 일본이 빨리 부흥되고 오키나와 전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날이 오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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