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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우치나와 미국의 가교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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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0년생
  • 슈왈츠(主和津) 지미 Jimmy Schwarz

TIMELINE관련 연표

1940
도쿄에서 출생.
1946
가족과 함께 도쿄에서 고향인 이에지마로 돌아오다. 아버지(고우치 료이치 씨)는 군에 고용되어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1948
8월 6일, 미군 폭탄 처리선(LCT, Landing ship tank) 폭발 사건 발생. 아버지를 포함하여 107명이 회생되다.
1950
미군에게 인수되어 이시카와시 히가시온나(현 우루마시)에 위치한 미군 탄약부대 숙소에서 생활 시작.
1957
슈왈츠 가족의 양자로 들어가 고우치 다쓰오에서 슈왈츠 지미가 되다. 이듬해 슈왈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다.
1960
미군에 입대하여 한국의 북위 38도선 부대에 배속되다.
1964
베트남 전쟁 파병. (1966년에 2번째 파병)
1967
가데나 기지로 돌아와 미군 통치하 오키나와에서 고등판무관 일등특기관 취임.
1972
퇴역 후 미국 국방부의 문민 직원으로서 가데나 기지에서 근무 시작.
2021
가데나 기지에서 퇴직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이에지마에서 발생한 미군 폭탄 처리선(LCT, Landing ship tank) 폭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미군에게 인수되어 탄약부대 숙소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슈왈츠 가족의 양자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군에 입대하여 한국과 하와이에서 근무하였으며, 베트남 전쟁에도 2번 파병되었다. 고향인 오키나와에 부임하여 미군정 오키나와의 최고 책임자인 ‘고등판무관’의 일등특기관을 맡았다.

미군 폭발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다

아버지는 통역으로

아버지는 오지제지라는 제지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에지마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영어를 공부해 나라의통역 일을 했었습니다. 전후에는 오키나와로 돌아와 이에지마에 있는 미군 탄약부대의 통역을 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에지마 미군 폭탄 처리선LCT(Landing ship tank) 폭발사고

큰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이에지마 타츄라고 불리는 성의 두 배 높이까지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습니다.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싶어 부두로 갔더니 어머니가 삼촌과 함께 아버지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시로 만든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리어카에 타고 있는 것은 아버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몸에는손, 머리, 발이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36세 어머니는 32세였습니다. 다섯째 아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두 달 후에 태어났지만 먹을 게 없어 영양 부족으로 감기에 걸려 죽었습니다. 

미군에 인수되어 기지 내에서 생활

미군에 의해 인수되어가데나 기지로

그 후 아버지의 상사가 가데나에서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미스터 메이닌이라는 사람이 우리 집의 생활을 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가데나 사령관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자녀들 중 한 명은 학교를 다니게 해준다고 메이닌씨가 어머니를 만나러 왔습니다. 가데나 기지에서 보살펴 준다는 조건으로1주일 후에 나를 데리러오기로 했습니다. 내가 선택된 것은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은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탓짱, 네가 가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 잣 등을 먹었습니다. 고기라고 해 봤자 쥐고기밖에 없었습니다. 가데나 기지에 가게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식사는 3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며칠 지나 미스터 메이닌과 탄약부대 장군과 존슨이라는 분이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기지 내에서의새로운 생활

좋은 옷도 사주고 나의 식생활도 바뀌고 영어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모두 스스로 하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미국인 대상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의 오키나와시에 있는 결혼식장 자리). 그 앞쪽에 있는 Quonset hut의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저를 입학시켜 주웠지만나는 영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나는 승부욕이 강해서 나를 괴롭히는 반 남자애들과 매일 싸웠습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나를 돌봐주는후원자를 불렀습니다. 당시 나는 “타츠”라고 불렸는데 “타츠는 일본 학교에 보내주세요” "이곳은 미국 국적의 아이들만 다닐 수 있으니" 라고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얌전한 아이였다면 그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미탄손의 키나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이에지마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은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배달 등으로 돈을 벌어 그 돈을 어머니에게 보냈지만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미군 탄약부대의 젊은 병사들이 미국에서는 구두닦이가 가장 많은 팁을 받는다고 하면서 구두를 닦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구두닦이 재능이 있다며 다들 좋아했습니다. 구두닦이로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이전보다 세 배의 돈을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는 이에지마에서 메밀국수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Schwarz가문의 양자로 미국에

슈왈츠 가족과만나 가족의 일원이 되다

그 후로는 생활이 안정되어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 후로 나는 여러 가지 스포츠를 시작했습니다. 그 중 슈왈츠 가문의 형제들과 같은 야구팀에 들어갔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나는 미국인 야구팀에서도 스타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슈왈츠 가문의 형제들이 점심 식사에 초대해주고 부모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슈왈츠 가문의 아버지는 군인이면서도 후텐마 침례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성경을 공부하게 됐으며 1년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슈왈츠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가는 것을 권했습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꼭 가겠다. 꿈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슈왈츠의 아버지는 이에지마의 어머니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고 싶으면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슈왈츠 가문에 입양할 절차를 밟았습니다. 

당시 미국인 가정에 대한 입양은 유럽에서 한 달에 2500명, 아시아에서는 한 달에 1000명씩 입양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양 수속을 다마쳤지만 미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1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미국에 가서 살았던 곳은 미주리 주 세딜리아였습니다. 

아르바이트 직장에서 그림 재능을 인정받다

슈퍼마켓에서 손님들의 물건을 포장하고 운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한지 2주 정도 된 어느 날 광고 포스터 제작과 공지 등을 담당하는사람이 쉬게 되어서 그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매니저가 찾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느냐고 물었기에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일을하게 해달라”고 대답했습니다. 매니저에게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물어보고10분만에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보여줬더니 "이건 누가 그렸냐?"고 매니저가 물었습니다. “제가 그렸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깜짝 놀랐다.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었어요" 라고 내가 대답하자 "내일부터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우리 직원으로 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가게의 직원으로서 포스터를 그리거나 유리창에 여러 상품의 광고를 그렸습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No”라고 말하지 않고 "Let me try" 라고 말했습니다. 

군인이 되어 한국· 하와이 베트남 오키나와로

군 입대를 지원하다

그러다 군대에 자원하는 날이 왔습니다. 군대에 소집돼 3달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희망하는 직종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각에 슈왈츠 아버지가 소속된 부대에서 하는 다이너마이트 전문직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한국의 북위 38도선 부대에서 다리 등을 다이너마이트로 부수는 것이 부대의 일이었습니다. 현지에서는 누구의 정보로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지만“지미는 전문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간판이나 그림, 감사장 등을 그리게 됐고 탄약은 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높은 사람 옆에서 미화 작업 등 하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들어가길 잘했습니다. 슈왈츠 가문도 부모님도 자신의 일은 자신이 선택하라고 하시면서 입대하는 것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의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야만 했습니다. 다만 나는 나를 키워 주신 은혜를 갚고 싶고 다시 오키나와로 돌아가 어머니와 형제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군에 입대했습니다. 처음 부임지는 독일이었지만 아시아에 가고싶다는 뜻을 사령관에게 전했습니다. 나와 같은 병과의 동기 부임지가 한국이었는데 그는 유럽에 가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이 저와 동기 두 사람의 수속을 진행하면서 내가 한국으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한국은 오키나와나 일본과 가까워서 한 번은 휴가를 받아 한국에서 오키나와로올 수 있었습니다. 내가 육군에 입대한 것은 1960년 1월 4일이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서 1년 근무 후의 부임 희망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오키나와나하와이라고 대답했더니 참모총장이 “25사단 사령관을 맡고 있는 동생이 있는 하와이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모총장의 편지를 들고 하와이로 부임했습니다. 그 후 하와이 사령부 중장이 베트남에서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전쟁에 가는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받고 베트남에 가서 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베트남에서 25사단 사령관에게 "다음 부임 희망지는 오로지 오키나와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사령관이 편지를 써줬습니다. "1주일 휴가를 줄 테니 이 편지를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나는 참모장에게 사령관이 써준 편지를 건넸습니다. 내가 그곳에 왔을 때는 자리가 없는 직종이었지만 결국 나는 엔지니어로 오키나와에 부임했습니다. 그것이흔치 않은 첫 사례였습니다. 

고등판무관의 특기관으로서

엔지니어에서 고등판무관 특기관으로

저는 류큐열도 고등판무관 밑에서 일하기 전에 3개월 반 동안 엔지니어로 일하게 돼  사이판 티니안 오키나와본섬 미야코 야에야마 각지의 해도를보고 얕고 매립 가능한 곳을 판단하여 지도를 전부 작성했습니다. 엔지니어 직무 기간을 마치고 판무관 면접을 봤습니다. 특기관 채용 면접에서고등판무관에 대해 “오키나와를 이해하고 "오키나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존경하는 분입니다"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우치난츄(오키나와사람)로 일본어도 할 수 있고 오키나와 사투리도 알 수 있다"  "열심히 할 테니 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날 참모장으로부터 “고등판무관이 만나고 싶다고 한다”는 연락이 와서 고등판무관을 만나러 갔더니 그는 "바쁜 내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했습니다. "당신이라면 여러 곳에서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팀에 넣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부탁했습니다. 고등판무관이 준 첫 번째 임무는 시찰 시의 대응 지원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시정촌장과 임원 그리고 일본 정부 간부들은 3년에 한 번씩 교체되는데판무관은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외딴 섬을 포함한 각 시정촌장의 사진을 받아 이름을 외웠습니다. 각 지역을 시찰할 때는 나도 동행하면서 고등판무관에게 현지에서 인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인사하는 상대방의 이름도 알려주면 고등판무관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 임무를 3개월에서 5개월 하고 그 이후에 고등판무관이 램퍼트로 교체된 후에도 저를 고등판무관 팀에서 일하게해 주었습니다. 

고등판무관시찰에 동행

시찰하면서 외딴 섬을 모두 돌아다녔습니다. 고등판무관은 오키나와 각지를 모두 돌아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저도 고등판무관의 비행기와 헬리콥터와 배를 타고 시찰에 갔습니다. 나하와 야에야마와 미야코에 각각 있는 고등판무관의 배로 작은 외딴 섬을 돌아다녔습니다. 미야코제도에 있는 인구 약 20명의 민나지마를 시찰할 때는 현지 사람들이 대접을 하기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섬에 사무관 배가 들어가지 못해 섬에서 사바니라는 작은 배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현지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어디든 시찰 가더라도 그 지역의 요구사항을 직접 참사관에게말하거나 구역 대표 등이 나에게 호소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무관에게 직접 전달하라고 내가 권유해도 "저런 사람과는 직접 얘기할 수 없으니" “당신이 전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에지마 시찰 시에는 꼭 나도 함께 갔는데 외딴 섬에 시찰을 갈 때는 촌장이나 마을 이장이 나에게 요청사항을 말 할 때가 많았습니다. "길을 만들어 달라, 길을 고쳐 달라" 등 주민의 요청에 대한 처리를 고등판무관에게 물었더니 그는 민정부에 가서 상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민정부에 가서 판무관님의 요청이라고 말하면서 판무관님이 받은 민원이니 제대로 알아봐 달라고부탁했습니다. 

고자 사건 현장으로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판무관과 함께 내 차를 타고 현장을 보러 갔습니다. 내 집이 판무관 집 맞은편에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불려갔습니다. 고자 사건이 일어난 것이 정말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도 헌병대 문제 등 여러 일이 있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때 나는 고등판무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눈빛이 마주쳤을 때 그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이기도 하고 미국인이기도 합니다. 나는 판무관과 함께 현장을 봤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현장을 본 것은 지금 생각 해보니 하나의 공부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복귀에 대해

야라 초뵤씨가 행정주석이 된 후부터 일본 복귀의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 있어서 5월 15일은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복귀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기지와 관련된 사람은 가족을 포함해 25만 명이나 됩니다. 건설업이나 다른 군 작업이 아닌 기지 관련일을 하는 사람이 예전에는 38만 명 정도였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일자리가 없는 시대에 기지 덕분에 생활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많이 있었습니다. 종전 직후에는 기계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비행장 등의 제초 작업으로 수천 명의 제초 작업자들이 기지 안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기계화되었지만 어떤 회사는 50년 가까이 기지의 제초작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시대가 바뀌어서 지금의 아이들은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옛날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겠지만 그 아이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이 살던 시대에대해 원래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당시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한 장 없다 하더라도 가족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는 가장 힘든 시기에 이에지마에서 나와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지금은 매주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거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부임한 한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아이들에게 구두닦이를 가르치거나 구두닦이 도구 상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오키나와에 돌아온 후 계속 고아들의 학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만 잘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두의 생활환경이 좋아져야만 합니다. 부모의 책임으로 아이들에게 그런 중요한 것을 알려주지 않으면 역사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복이 많아서 용돈도 받을 수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이든 살 수 있습니다. 그건 좋지 않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미국처럼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노력해서얻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체격도 좋으니 남을 돕는 일도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교육적 차원에서 부모와 조부모 시대에 삶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오키나와전 항복 조인식의 장을 평화공원으로

항복 조인식 장소를평화를 기원하며 정비

이곳은 평화공원으로 기념하는 곳입니다 미군(10군단)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화의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오키나와전 항복문서조인). 이곳은 정말 중요한 자리입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가족을 남겨두고 전장터에 나가는데 과연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군인으로서 전쟁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국가적으로도 태평양 전쟁이 하와이에서 시작되어 오키나와전 항복 조인식이 있었던 이 곳에서 끝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장소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세 번 정도 다시 만들었습니다. 현대적인 디자인도 했지만 태평양사령관으로부터 예산상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저는 자재 등을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나하항공자위대로부터 기부 받은 10만 엔으로 돌을 마련했습니다. 배치된 돌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국가를 상징합니다. 여기에 있는 녹색은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향나무는 어떤 기후에도 강하고 항상 푸르른 나무이기 때문에 “세계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야자수는 태평양을 상징하기 위해 심었습니다. 이 소철나무는 종전 후의 고통스러웠던 시절처럼 “다시는 이 나무의열매를 먹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내가 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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