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본 일본 복귀
- 19491940년생
- 오시로 카즈키(大城 和喜)
TIMELINE관련 연표
1949 |
하에바루초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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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
초등학교 5학년 때 나하고등학교에서 열린 연설 집회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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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나하에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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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지넨고등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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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전교생에게 항의대회와 시위 참가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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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고등학생 부락문제연구회 참가. 오키나와의 현상에 대하여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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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2월 24일, 교공2법 저지 투쟁의 현장을 인근 건물 베란다에서 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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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미일 양정부에 대한 항의 현민대회’에서 고등학생 대표로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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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5월 15일, 오키나와 시정부가 반환되다(오키나와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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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하에바루초 공무원으로 근무(~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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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전 하에바루문화센터 관장. 유년기 때부터 사회 정세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어른들과 함께 오키나와 복귀 운동 집회 등에 참가. 학생회 임원으로서 다수의 학생을 동원하여 집회나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대표 인사를 맡기도 하였다. 오키나와 반환 후에는 하에바루초의 공무원으로서 문화 행정과 오키나와 육군병원의 문화재 지정 등에 관여하였다.
소년이 본 복귀 전 연설 집회
소년 시절에 찾아간연설 집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4. 28인지 무슨 집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하고등학교에서 현민대회인지 무슨 대회가 있다고 해서 저녁 5시쯤 나하고등학교에 가려고 오키나와 버스 오사토선을 탔습니다. 출근시간도 퇴근시간도 아닌 저녁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버스는 붐비고 만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있는데 차 안의 대화가 들려왔습니다. 예를 들면 "세나가 카메지로의 이야기는 오키나와 연극보다 더 재미있어" 이에 맞장구를 치듯 "그래, 정말 잘하지" "아사토 쓰미치요도 말을잘 해요" "아니야, 연설은 세나가 카메지로가 제일 잘해" 그런 대화가 들렸습니다. 나하고등학교 연설회장에서 세나가 카메지로가 무엇을 말할지 어떻게 미국을 비판할지 아줌마 아저씨들이 기대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세나가씨 등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흥미가 저절로 생기는 차내 분위기였습니다. 그 버스는 요기공원 방면으로 오키나와대학 앞에서 요리미야를 지나 요기 사거리에서 간자토바루 방면으로 우회전한 그 길목에 난코식당이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그곳에서 차례로 내렸습니다. 아마 승객의 80~90%는 내렸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의 행렬이 가이난을 향해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나하고등학교 운동장까지 갔습니다. 당시 나하고등학교 운동장이 가장 컸습니다. 현 내 고교 야구대회나 사회인 야구대회도 그곳이 상설 경기장이었습니다. 현민대회나 항의 집회도 대부분나하고등학교에서 열렸습니다. 나하고등학교 운동장은 정치 집회의 장소이기도 하고 스포츠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붉은깃발 또는 각 단체의 깃발을 든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디 쯤에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직원도 아니고 5학년 정도였으니 아마 어딘가 먼 곳 1루 쪽 관중석에 계단이 있었는데 거기에 앉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카메지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세나가 카메지로의 차례가 되면 모두가 주목했습니다. 세나가씨는 연설에서 "미 제국주의는 당장 미국으로 돌아가라" “양키 고 홈”이라고 제스처를 취하며 몸도 흔들고 있었습니다. 입꼬리에서 거품이 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장내에있는 사람들은 연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시타이햐ihya(잘 한다)”, “카메지로”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연설장은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카메지로라는 멋진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이라 오키나와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 있다 보니 자신도 사회의 움직임에 조금이라도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오키나와 방문(1960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1960년,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미국 대통령을 보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젠하워라는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베틀질을 하고 매일 나하로 옷감을 팔러 나가셨습니다. 공설시장입니다 마침 어머니와 내가 구경하러 자리를 잡은 곳이 가이난이었습니다. 아마 가이난류에이라는 영화관의 주변이었을 것입니다. 도로 양옆으로 이중 삼중으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는지 “대통령 돌아가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 퍼레이드가 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복귀운동과 정치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의 분위기
눈앞의 일밖에 몰랐습니다. 오키나와 전체를 볼 수도 없었으니까요. 나하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연설 집회 분위기에 젖어 들면서 5학년밖에 안됐지만 정의감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미국은 오키나와 측에서 보면 악한 존재였습니다. 역시 오키나와가 옳다, 오키나와에서나가라! 나쁜 놈은 나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념고등학교 학생회 임원으로서
지넨고등학교 입학
1964년 도쿄 올림픽 당시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이듬해 4월에 지넨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기베 케이슌이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학생회 고문은 아니지만 나에게 학생회 부회장을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회장은 아라카와 토모키요군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기베 선생님은 매우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강의할 때 교탁 위에 이렇게 앉으셨어요. 가죽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기베 선생님은 수업을 하셨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세계사 수업이었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매우 가까운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세계사도 좋아해서 기베 선생님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회장을 맡으라는 말씀을 듣고 즉답은 아니었지만 맡기로 했습니다.
항의 대회참여를 호소
학생회 일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4월 28일 집회 참여입니다. 그때 전교생에게 호소해 집회에 참여하게 한 적이 있었어요. 학생회 입장에서 4. 28 대회를 위해 동아리 활동을 모두 중단시키고 집회 장소(요기공원)와 시간을 알렸습니다. 당시 요기공원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컸습니다. 10만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집합 시간을 알려주고 전교생에게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당일 요기공원에 가보니 600명 정도가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넨고등학교는 보통과 6학급, 상업과 2학급 가정과 3학급로 10학급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30개 학급으로 전교생이 1200~13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 중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요기공원에 모였습니다. 그곳에는 학교별로 줄을 섰고 이토만 고등학교에서도 그 정도의 인원이 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슈리고등학교, 헨토나 고등학교, 고자고등학교, 마에하라 고등학교에서도 왔습니다. 우리 학생회 임원들은 줄을 잘 서게 하는 일도 했습니다. 대회의 연설이 끝나면 요기 공원에서히메유리 거리를 지나
아사토에서 국제거리, 류큐 정부 앞까지 시위 행진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요기공원에서 대회와 집회가 끝나면 다음은 시위 행진을 합니다. 각조직, 노동조합, 선생님들의 그룹, 학교별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지넨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뒤를 따라 행진했습니다. 아마 고교노조 지넨고등학교 분회가 있었나 봅니다. 기베 선생님들이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따라간다는 생각보다 비록 선생님들 뒤를 따르고 있지만 “우리가 주인공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600명이나 되니 꽤 긴 행렬이었습니다. 옆으로 네 줄이나 다섯 줄 정도로 걸었습니다. 도로는 물론 차량통행금지입니다 우리 학생회 임원 3~4명이 마이크를 잡아 "영차(외침) 영차(응답)" 외쳤습니다. 피곤해지면 “자, 다음은 프랑스 시위입니다”라고 외칩니다. 프랑스 데모란 손을 맞잡고 도로 폭을 가득 메우면서 평온하고 부드럽게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슈프레히콜”이라고 하면서우리가 “양키 고 홈”이라고 하면 모두 같이 말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라고 말하면 모두 같이 같은 말로 답했습니다.
국제거리까지 오면 행인들도 도로변에 많이 모여 모두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응원의 박수를 받고 마음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그때는 삶의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있다고나 할까 스스로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과 그런 의식이 점차 고양되어 갔습니다. 집단이란 그렇게 연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 같이 가자”라는 생각이 점차 고양돼 성취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서로 데모할 때 어디에 있었느냐 그런 대화를 했습니다. 학생회에서 가라고 한다고 해서 아무도 집회나 시위에 나가지않습니다. 참여함으로써 즐겁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매우 불타는 무언가가 있고 성취감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노래라는 것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단한 흙을 깨고. . . ”('오키나와를 돌려줘' 가사)나 “힘내자. . . ”('힘내자' 가사)를 부르면 "우치나엔츄는 하나다"“이렇게 헤쳐나가자”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으면 고등학생도 큰 성취감을 느끼면서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기베 선생님에 대해
기베 선생님은 말투가 매우 직설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애착이 가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매우 가까운 존재처럼느껴졌습니다. 기베 선생님은 무뚝뚝했지만 애정이 많이 느껴지는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오키나와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말씀하지않았습니다. 현장을 보라고, 참여하라고만 하셨습니다. 기베 당신의 이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해도 학생들이 따라가지 않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기베 선생님은 현장에 학생을 데리고 가서 학생 스스로 느끼고 배우게 하는 교육을 했습니다. 그것은 정치 교육이 아닌인성교육으로 스스로 느껴보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교공2법 저지 투쟁을 보고
교공2법 투쟁
교공2법 저지 투쟁은 1967년 2월이었습니다. 교공2법 저지 투쟁은 항의집회처럼 저녁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입법원 의회의 개회가10시라서 아침 일찍부터 입법원 앞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선생님들도 연가를 써서 가셨을 것입니다. 지넨고등학교에서는 나 한 명만 지명되어 참가했습니다. “너는 꼭 봐 두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볼 필요가 있다, 공부도 된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나도 휴가를 내고 입법부 앞에 갔습니다.
당시 입법원은 지금의 현 경찰 본부가 있는 곳에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레인보우 호텔이 있었습니다. 그 호텔 3층 베란다에 1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였습니다. 기동대와 선생님들이 서로 부딪쳐서 파도 치듯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도 몇 번봤습니다. 기동대는 입법부 앞에 서 있고 그 뒤에는 입법부 건물인데 교직원 노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동대가 건물 앞에 서 있었습니다. 군중이 눈사태처럼 기동대를 향해 몰려들면 기동대가 한 번 물러섰다가 다시 조금씩 밀어내는 모습이 잘 보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번 본 것은선생님들이 기동대를 한 명씩 빼내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뽑아냈느냐 하면 대기하고 있는 기동대원 한 명을 붙잡고는 5~6명이 힘을 합쳐 빼내고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한 명 빼내는 데 성공하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도 호텔에서 "더 해라, 더 해라"라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고, 그런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시위대가 더 유리했습니다. 기동대는 수백 명이고 이쪽은 수만 명입니다. 압도적으로 사람이더 많았기 때문에 교사들과 노동조합 등의 저지 행동으로 교공2법 법안은 폐기되었습니다. 입법부의 의회를 열지 못해 폐안이 되었습니다. 교공2법이라는 것은 두 가지 법률을 말합니다. 교육공무원 특례법과 또 하나 지방교육구 공무원법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선생님들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키나와 복귀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돼 있었고 교공2법 저지 투쟁도마찬가지였습니다. 복귀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자치권 개혁 확대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이겨서 폐안으로 몰고 간 장면 그현장을 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베 선생님은 스스로 이론적인 것은 말씀하지 않으시고 “현장에서 배우라”는 주의였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끝나고 나서도 "봤느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땠는지 묻지 않았지만 그게 좋았습니다. “소감문을 쓰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기베 선생님의 인간성에 점점 매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들이 고등학생들의 손을 잡고 정치적인 것에도 관심을 갖는 오키나와의 청년으로 키우려는 방침이 고등학교 교직원 노조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베 선생님은 우리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오키나와의 고등학생 대표로서
항의 집회에서의 고등학생 대표 인사
1967년 11월에 간 집회는, 사토 총리가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하러 가는데 협정의 내용은 뻔하기 때문에 미국 방문을 저지하는 미국에 가지못하게 하려는 항의 집회였습니다. "이번엔 요기공원이다"라고 기베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이번엔 요기공원이다" 그 말 만으로도 통했습니다. 신문 등을 보면 요기공원에서 항의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토 총리 방미 저지 항의대회는 요기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선생님에게 지명을 받아 대표 인사를 해야 했지만 선생님은 아무것도 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사말은 전부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맡겨주셨다고 할까, 좋게 말하면 믿어주셨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은 그런 지도도 하지도 않고 원고도 보지 않고 인사말 원고를 체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쨌든 “몇 분 정도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첫 마디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모르고, 우리는 전후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배 그리고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전후 오키나와의 상황을 배웠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오키나와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인 우리도 그런 관심을 가지고" "항의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많은 고등학생들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고자나후텐마, 이토만 학생들은 모두 선생님이나 부모님들로부터 배워 왔습니다. 이것은 나 뿐만 아니라 참가 학생들 모두의 생각입니다. “미군 관련사건 사고도 있었고 오키나와의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비록 고등학생이지만” 그런 마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내용을 말했습니다.
대형 트럭 세 대의 짐칸을 만든 연단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단상에 서 있는 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들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데 사회자가 "앉으세요"라고 말하자 어디서 “땅이 없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대답을 아주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토지수용 문제가 있었습니다. 곤부(현 우루마시)와 같이 땅을빼앗긴 곳도 있었습니다. “앉을 땅이 없다, 땅을 돌려줘”라고 한 것 같아 장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대회는 매우 뜨거워졌습니다. 나는연설이라기보다는 그냥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응은 잘 모르지만 형들이 “잘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부락차별 문제전국 집회 참가
역시 기베 선생님이 저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신 것은 “너도 장래에는 오키나와에서 열심히 해라” 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기베 선생님이 "이번엔 교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토에 가기 전까지는 오키나와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나도 몰랐습니다. 천민으로 차별받는 부락민에 대한 차별 해소 교육과 부락문제에 대해 당사자 고등학생들의 전국 집회가 교토에서 있었습니다. “나와 같이 그곳에 가자”는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선생님을 따라 토마리항에 갔습니다. 본토에 가려면 여권도 있어야 하고 예방주사도 맞아야했습니다. 히메유리마루라는 배를 타고17시간 만에 가고시마항에 도착했습니다. 역에서 8시 23분에 출발하는 오사카행 기리시마2호를 탔습니다. 전국대회에는 14개 부와 현에서 218개교 약 1590명이 참가했습니다. 이것은 부락 문제의 규모라 할까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느곳에나 부락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날은 분과회, 둘째 날은 전체회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전체회의에서 오키나와에서의 보고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 당시 오키나와의 현황과 정치 상황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당시 “도모리 재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꽁치 사건”도 있었지만 도모리 재판과 꽁치사건은 별개입니다. “도모리 재판”이란 입법원의원 선거에 당선된 도모리씨가 당선무효가 된 것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재판입니다. 재판 직전에 미군 법원으로 이송된다는 재판 이송 문제 꽁치 사건도 마찬가지로 재판이 오키나와 법원에서 미국 민정부의 법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고등학교에서도 기지의 폭음으로 수업이 중단되기도 하고 각종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동화 문제에 대해 배우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역시 이것은 차별 문제입니다. 오키나와도 일본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고 차별문제와 오키나와의 문제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가 배우는 것을 기베 선생님이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본토에도 그러한 부락 차별 문제가있고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과도 연결되어 있는 만큼 오키나와의 고등학생이지만 일본 고등학생의 문제도 배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토에서의 대회에서 일본의 고등학생들과는 교류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도 멀고 교류할 수 있는 장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참가하고나니 연결될 것 같았습니다. 연대감같은 동료의식이 생겨났습니다. 서로의 문제를 공통으로 이해하려는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뿌리는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베 선생님도 그 점을 내가 깨달을 것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한 교육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교육자입니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의 알에서 병아리가 부화하지요.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는 것은 어미 닭이 밖에서 따뜻하게 해주고 껍질을 쪼아주기 때문이고 따뜻하게 해주지 않으면 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껍데기 안쪽에서도 병아리가 쫍니다. 어미새가 따뜻하게 데워서 껍질을 쪼아주고 껍질 안에서도 병아리가 쪼고 동시에 하면 병아리가 부화합니다. 그것을 “줄탁동시”라고 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선생님들은 병아리인 나를 부화시키려고 선생님들은 따뜻하게 지켜보고 이끌어 줄 테니 너는 너 스스로 배워라. 스스로 껍질을깨고 나오라고 선생님들은 그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선생님들의 태도,이것이 교육의 깊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이끌어 주면서 학생은 공부하고 조금씩 깨어나갑니다. 선생님들이 그것을 이끌어 주시는 그런 학생과 선생님의 신뢰 관계가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전하고 싶은 것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지금 아이들은 신문을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TV 뉴스도 잘 보지 않는 스마트폰 생활을 하다 보니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도 별로 하지 않고, 더군다나 부모들도 오키나와전을 겪은 세대도 아닙니다. 나와 같은 할아버지 세대도 이제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 지금도 오키나와는 변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변한 것 같지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가까운 것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우선 신문 정도는 읽는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공부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영상을 봐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감성을 키우는 것 나쁜 것은 나쁘다 좋은 것은 좋다, 그것은 전쟁뿐만 아니라풍부한 감성을 키우면 전후의 상황이나 전쟁의 문제에 대해 꼭 느낄 수 있도록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키나와의 아이들이 감성이 풍부한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고 감성을 키우면 오키나와 전쟁에도 관심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