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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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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류미문화회관과 함께 걸어온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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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관련 연표

1944
미야자키현 다카오카초로 피란을 가다.
1946
오이타에 있던 형과 함께 오키나와로 돌아와 아버지가 있는 니시오모테지마에서 생활.
1951
가족과 함께 나하로 돌아온 뒤 나하에 있는 모터풀에 취직
1951
나고, 나하, 이시카와에 류미문화회관이 설치되다.
1952
류미문화회관 감독관(그레이스 K. 요코우치씨)의 전속 운전기사가 되다.
1952
미야코, 야에야마에 류미문화회관이 설치되다.
1953
나고 류미문화회관에서 나하 류미문화회관으로 근무지 변경.
1966
하와이 이스트웨스트센터에서 3개월 동안 연수를 받다.
1972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일본에 반환되다(일본 복귀).
1972
오키나와 일본 복귀에 따라 류미문화회관에서의 20년 동안의 근무가 끝나다.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류미문화회관의 직원으로서 20살 때부터 1972년 오키나와 반환 때까지 근무. 미국의 근대적인 사회 교육을 전후 오키나와에서 실천한 현장의 사람 중 한 명으로, 류미문화회관의 역할을 잘 아는 인물. 취미인 우표 수집과 LP 감상, 기타 팸플릿 등의 편집 기술은 문화회관 시절에 배웠다고 한다.

전후의 나하에서의 생활

피란처에서의 귀환과그 후의 생활

1946년(쇼와 21년) 9월당시 오이타에 있던 형과 함께 오키나와로 돌아갔습니다. 오키나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계셨던이리오모테섬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리오모테섬에 4년 정도 살다가 나하로 돌아와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9월에 오키나와 본섬에 와서이듬해1951년 1월에 나하의 모터풀에 취직했습니다. 자동차 관련 기술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모터풀에서 미국 민정부에 차량담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 중 한 대의 담당으로 내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가미야마중학교가 있는 자리는 당시에는 미국 민정부가사용하던 USCAR(류큐열도 미국 민정부)의 시설이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과의 관계

류미문화회관 감독관의 운전기사가 되다

1952년에 요코우치씨가 나고 담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나고까지 매일 통근하는데

요코우치씨와의 만남

“매일 가는 것이니 같은 운전기사가 좋다”고 해서 나는 요코우치씨의 전속 운전기사가 되었습니다. 요코우치씨의 이름은 그레이스 K. 요코우치입니다. 첫 만남이 좋았습니다. 요코우치씨는 매우 잘 해주었고 운전기사라기보다는 자기 자식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요코우치씨의 큰 딸이나와 같은 나이로 자식을 보는 것과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관장이라기보다는 감독관 같은 입장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문화회관 전체를 감독하는위치에서 사람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회관의 행사 등을 모두 보고 있었습니다. 

각지의 류미문화회관

오키나와에는 다섯 개의 류미문화회관이 있었습니다. 아마미에도 있었지만 1953년 복귀되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오키나와에는 나고, 이시카와, 나하, 미야코 그리고 야에야마 등 5개가 있었습니다. 나고는 직원이 12~13명 정도였습니다. 나하는 조금 더 많았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는도서관과 행사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관외 활동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요코우치씨가 부인회 등을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현지의 문화적인 것을 이끌어 내고 미국 측에 소개하는 등 잘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사”는 그 당시 각 부락에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한곳에 모아 미국인에게 소개하는 것이 전후 에이사 축제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코자(현 오키나와시)에서 이제 수십 회 해 왔다고 하지만 그 전에 나고에서 한 것이 시작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행사부에서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서로 의논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이걸 해보자”고하면 시작하는 식이었습니다. 위에서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시행하는 방식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것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원인일 것입니다. 

류미문화회관의 지도자들

요코우치씨가 왔을 때는 각 관에 감독관이 있었습니다. 그후 한명 두명 귀국하게 되면서 귀국하게 되면서 결국 남은 것은 요코우치씨와 당시이시가키(야에야마 문화회관)에 있던 팜로이라는 외국인이었습니다. 나하 문화회관에는 플랭크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1953년경도중에 귀국했습니다. 이시카와 문화회관에도 있었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관은 매주 1주일 분량의 행사를 USCAR에보고했습니다. 요코우치씨는 자주 타자기를 치고 있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에 근무

나고 류미문화회관에서의 직무에 대해

나고에서는 요코우치씨의 운전기사 업무가 주 업무였는데 운전기사 일 외에는 도서관 대출을 돕거나 영사기 취급 등 다른 일도 했습니다. 그때는 B엔(미군 군표) 시대였기 때문에 월급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일을 통해 배운 것

나고에서 근무할 때는 자신의 취미와 일이 같은 상태였습니다. 행사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법을 배우고 음악 감상 등도 했습니다. 음악 감상은 나고에서는 조금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표 수집도 그 무렵에 시작했습니다. 우표 수집은 나고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하 문화회관에서는 우표 전시회도 있었습니다. 나하 문화회관에는 시모지씨라는 우표 수집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역 인재의 활용

역시 지역 주민을 채용하면 사람들과의 교류가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역에서의 활동이 쉬워집니다. 그런 인재를 발굴해 더 좋은 일을 할수 있도록 하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성 활동을 통한 문화 교류

그렇게 부녀회 활동을 통해 협조를 받았습니다. Ogden씨(미국 민정부장관)의 부인은 Rycom의 시설에서 기프트숍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키진 등에서 만든 고사리로 엮은 바구니나 기조카의 옷감이나 돗자리 등을 소개하며 류큐 숍에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를 통해 친해지면서문화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장점을 미국에 소개하는 것은 문화회관 설립의 지침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오키나와와 미국의 문화교류는 그런 점에서 시작됐습니다. 

미국에 한 번 귀국한 요코우치씨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고에서 나하 문화회관으로 옮겨 다시 요코우치씨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요코우치 씨의 두 번째 부임 시에는 나하에서 일하고 주말에 나고에 가서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요코우치씨는 USCAR 내부라기보다는나하 류미문화회관에서 문화회관 전체를 봤습니다. 미야코와 야에야마에도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하류미문화회관에서의 활동

나하 류미문화회관

나하류미문화회관에서는 운전기사 업무를 떠나 스스로 여러 가지 생각하며 일을 했습니다. 그것을 인정해 준 것이 사무엘 N. 무카이다씨였습니다. 무카이다씨 때 문화회관의 활동이 꽃을 피웠습니다. 음반 감상회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부관장인 시마모토씨가 하던 것을내가 이어받았습니다. 음반 감상회는 나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4년 정도 음반 음악을 틀어준 것이 나에게는 매우 큰 일이었습니다. 복귀 전에는 음반 감상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은 하지 않는 일로 내 보물이 되었습니다. 음반 감상회는 방송과는 별개입니다. 처음에는 토요일에 하는 토요 콘서트라고 해서 “토요콘”이라고 했고 나중에는 둘째 주 금요일에 하는 콘서트라고 해서 “이금콘”이라고 불렀습니다. 몇 번 진행했을지? 이 실크스크린을 가르쳐 주신 분은 무카이다씨입니다. 이것은 매주 금요일에 하던 것입니다. 전부 수작업입니다. 이전 담당자 때는 이런 게 없었습니다. 이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파초 줄기를 자르고 그 절단면으로 틀을 잡고 있습니다. 이것도 판자의나뭇결을 이용한 것입니다. 

“어린이 클럽”의 활동

“어린이 클럽”입니다. 예전부터 있던 것을 전 담당자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내가 이어받아서 나하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어린이 클럽을 만들어서 교류하게 하고 서로의 장점을 끌어내자는 취지로 이바라(현 난죠시)에 만들었습니다. 결국 (일본) 복귀가 결정되어1963년경부터 몇 년경까지였을까?어린이 클럽의 교류는 복귀 직전까지 했습니다. 여름에는 캠프를 했습니다. 이동에는 미군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버스 배차는 내가 아니라USCAR에 부탁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이바라에서 “일일 캠프”라는 하루 만에 끝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 날 바다에 갔더니 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1964년인가 싶지만 어린이 클럽에서 어린이날에 류큐방송에서 인형극을 했습니다. 방송국 측에서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날이니까 어린이 클럽이 하는 것을 방송하게 되었습니다. 어른이아닌 어린이들이 했습니다. TV 방송이었습니다. 음성만 테이프에 담았습니다. “선생님의 주머니”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주머니에는무엇이 들어있을까”라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하와이 연수

동서문화센터 East-West Center에서 연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민정부가 의논하고 허가를 내주는 것은 고등판무관이었습니다. 고등판무관이 사인한 서류가 있습니다. 동서문화센터에서 연수 제휴를 하는 것은 호놀룰루 시청이었습니다. 거기에도 비슷한 업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연수라고 하지만 우리는 놀았습니다.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하와이의 초등학교는 일본의 학교와 달리 규모는 작지만 학교 옆에는 굉장히 넓은광장이 있고 학교와 광장이 있고, 그 옆에는 레크리에이션 센터가 있고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그곳으로 이동해서 여러 활동을 합니다. 그것이 문화회관과 비슷했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5시에 일이 끝나면 데리러 옵니다.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돌보는 구조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원의 처우에 대해

이런 제도가 다른 곳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급여 외에 영어 시험에 합격하면 10%의 수당이 붙었습니다. 시험은 쉬웠기 때문에 나도 바로통과했습니다. 월급이 오르면 그만큼 수당도 올랐습니다. 이것은 USCAR가 발급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이 발급하는 패스 “허가증”입니다. 군고용인들은 모두 이런 카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류미문화회관이 완수한 역할

류미문화회관의 역할

그때는 정말 문화회관이 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문화”라는 것을 발신했다고 하면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오키나와의 문화 활동의 발신지였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복귀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모처럼 해온 좋은 활동이 없어지는 것은 아쉽고 정말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앞잡이의 입장으로 일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산은 미국에서 지급되지만 이 일의 상대는 오키나와 사람들이잖아요. “미국의 앞잡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운합니다. 문화회관을 이용하신 분들은 “정말 좋았다”고 “좋은 시설이었다” 고 말해주십니다. 왠지 정말 아쉽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나에게는 20세부터 40세까지 20년 동안 문화회관이 생긴 것은 1951년이지만저는 1952년부터 72년까지 20년 동안 정말 인생에서 충실하고 좋은 시기를 계속 문화회관에서 보냈습니다. 거기서 인격형성 등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회관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문화회관에서 보낸 20년은 정말 좋은 20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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