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두판매로 시작한 우산 장사
- 19291940년생
- 스가마 토쿠지로(須鎌 徳次郎)
TIMELINE관련 연표
1929 |
미야코지마 시모지촌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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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미야코지마에서 전쟁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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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23살 때 미야코지마에서 나하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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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B엔에서 달러로 법정통화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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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4개 거리로 구성된 가부강 상점가 조합이 결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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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가부강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개수 공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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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가부강 수상점포 개축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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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가부강 개수 공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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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5월 15일,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반환되다(일본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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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증언
증언자 약력
미야코지마 출신으로, 전후 나하로 이주. 미군 고용 경비원 등을 거쳐 나하의 상점가인 마치과 우산 가두 판매를 시작하였으며, 오랫동안 가부강 수상점포에서 우산 판매점을 운영하였다. 가부강 중앙 상점가 조합의 임원을 역임하였으며, 전후 나하 마치과의 변천을 지켜보아 온 인물이다.
미야코지마에서의 전쟁 체험
1929년 미야코 섬의 시모지촌의 가테카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은 하루 세 끼는 고구마를 먹고 살았습니다. 쌀은 명절이나 설날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중의 미야코지마
전쟁 중에는 미야코의 인구보다 아군인 일본 군인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미야코를 지키기 위해 미야코 주민보다 더 많은 군인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미야코 섬은 작은 섬인데 미국 비행기가 항상 상공을 날아다녔습니다. 그 전에 오키나와 본섬에서는 10. 10 공습이 있었고 구나하 시내가 전멸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방위군으로 소집되면서 내 친구 5명, 선배 5~10명이 소집되었습니다.
우에노무라에는 나카비행장이 있었는데 나카비행장의 일부 산에 동굴(방공호)이 있었습니다. 미야코에 있는 부대의 높은 사람들이 그 방공호 안에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였기 때문에 “꼬마”라고 불리며 높은 사람의 구두를 닦기도 하고 함께 놀기도 하면서 나카비행장 근처의 동굴(방공호) 안에서 한 달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은 끝났습니다.
종전 직후의 힘든 생활
종전이 되자 미야코 사람들은 피란처인 대만에서 많이 돌아왔습니다. 미야코에 돌아와 자기 밭이 있는 사람은 고구마를 먹을 수 있지만 밭도 없이대만이나 다른 피란처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한동안은 힘든 일을 겪으며 상당히 고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밭이 없어도 친척이라도 있는 사람은그나마 그 인연으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미야코섬은 식량도 물도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과 비교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하에서 장사를 시작하다
미야코지마에서 나하로
그래서 미야코 섬에 사는 것을 포기한 많은 사람들이 나하로 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먹을 걱정은 없었지만 친구들은 모두 섬을 떠났기 때문에 내가 23살 때 혼자 배를 타고 나하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나하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본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나 전후에 타지에서 돌아온사람들 필리핀 쪽에서 돌아온 오키나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하로 갓 건너온 23살 때 미군 고용의 가드(경비원) 일도 했습니다. 30대 후반 무렵부터 평화거리에서 우산 가두판매를 했습니다.
우산 가두판매로장사를 시작하다
처음엔 주로 여성용 양산을 팔았고 비가 오면 남성용 우산도 조금 준비해서 팔았습니다. 처음엔 자금이 없어서 하루에 20개 정도밖에 못 팔았습니다. 우산을 사다가 묶어서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평화거리에 가서 팔았습니다. 양산은 잘 팔렸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니까 미조키(납작한 원형의키)에 끈을 달아 그것을 목에 걸고 여러 가지 소품도 팔았습니다. 가장 돈을 많이 벌었던 때는 추석과 설날이었습니다.
평화거리에서 가두판매를 한 것은 그곳에 나하의 시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식료품 시장은 3번째 지어진 건물이지만 당시 식료품 시장은 가장 남쪽에 있었습니다. 그 맞은편에 잡화상과 그 옆에 의류상이 있었고 잡화상과 의류상 사이의 거리가 평화거리였습니다. 원래 미쓰코시가 있던 곳에서 언덕을 내려온 곳이 평화거리였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 평화거리였기 때문에 거기서 가두판매를 했습니다. 평화거리 모퉁이에는 파출소가있었습니다. 평화거리 파출소에는 항상 순경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가 미조키를 들고 가두판매를 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방해가됐을 것입니다. 통행하는데 방해가 되니 돌아가라고 순경에게 자주 혼났습니다. 생계를 위해 경찰관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에게는 아이와아내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하지 않고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느냐”고 호소해도 하루 종일 파출소에 갇힌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은 상가 아래를 흐르는 가부 강변은 강변 양쪽에서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강가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과일 등을 팔고 있었습니다. 우리 삼촌도 그 파출소 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의지해 강가에서는 자리 잡지 않았습니다. 평화거리 파출소 대각선 맞은편에 전신주가 있었고 그 양쪽에는약국이 있었습니다. 약국 사이 골목길 쪽에 전신주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가두판매 장소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아도그곳에 놓아두기만 하면 저녁까지 팔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주변에서 같은 미야코 사람이 10명 정도 우산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라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라부 섬에 밭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미야코 사람이 5~6명 정도 있었습니다. 가두판매를 하기 위해 미조키를 들고 있던 사람은 도미시로 여자가 15~16명 미야코 여자는 2~3명 밖에 없었습니다.
의류 중심의 신텐지 시장
신텐지시장은 오키나와 본토 북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500~600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입품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부터 어른까지 오키나와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하며 생활했습니다. 신발은 없었지만 남자도 여자도 신텐지시장의 제품(의류)을 사용하며 생활했습니다.
가게를 차리고 우산을 팔다
가부강 변에 가게를 차리다
1962년에 가부강 개수 공사가 있었는데 그 10년 전부터 가부강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미군의 천막을 치고 강가에 가게를 만들어장사를 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가두판매를 했는데 가부강가에서 가게를 하던 친구가 장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나에게 가게를 인수하라고 해서 나는고맙게 가게를 인수하였습니다.
지금의 공설시장과 가부강 사이에 중앙시장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시장거리에서 에비스 거리로 들어가는 곳에 나무다리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다리는 에비스 거리로 건너가는 다리인데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에비스 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에비스 다리 옆에서 작은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가두판매는 그만뒀습니다. 천막 가게는 친구에게 인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임대료는 그대로였고 땅 임대료는 벤쿄도에게 냈습니다. 그러던 중가부강 공사로 새로운 수상 점포가 생기면서 그 이후로는 땅의 넓이에 따라 땅 임대료를 냈습니다.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해도 본토에 업자가 없어서수익이 좋았습니다. 가게를 가지고 있으면 역시 다릅니다. 가두판매는 손으로 들 수 있는 만큼 밖에 못 팔지만 작은 가게라도 있으면 벽에 파이프를걸든 궁리해서 팔 수 있었습니다.
판매용 우산 만들기
어느 정도 자본금이 생긴 후에 오사카에서 내가 원하는 원단을 샀습니다. 내가 거래하는 업체는 도매상이기도 하고 공장도 갖고 있어서 원단을 사서공장에 가져가 우산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산 원단은 무늬가 있는 것만 팔았습니다. 여러 원단 도매상에서 마음에 드는 원단을 샀습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의 원단이 있었고 원단 가게에서 원단을 사서 우산을 만들게 했습니다. 1000개 정도 직접 우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야코 야에야마
그리고 내가 사는 지역에도 상품을 도매로 파는데 나 혼자서는 소매를 할 수 없습니다. 나고시나 오키나와시 쪽에는 많은 상품을 도매했습니다. 도매업 고객은 수십 명 됐습니다. 내가 우산을 판매하게 된 무렵에 접이식 우산이 나왔습니다. 그게 점점 개량되어서 양산 우산 겸용도 꽤 많이 취급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산 우산도 취급하고 미국인들도 자주 사러 왔습니다. 베트남에는 원터치로 펴지는 우산이 없었던가 봅니다. 미군들이 오키나와에서 우산을 많이사가곤 했습니다. 베트남 군인이 아니라 한국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산을 케이스에 넣은 채로 뜯지도 않았습니다. 한 상자에 60개씩 들어있었는데 그들은 남성용 검은색 우산만 샀습니다. 한국인 선원과 병사들이 많이 사갔습니다. 지금의 나하항에 당시 미군의 LST(탱크 양륙함Landing ship Tank)라는 큰 배가 선체 앞이 열린 상태로 정박해 차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 들어가라고 해서 차로 배 안에 들어갔습니다. 일본어를 조금 할줄 아는 한국인이 2, 3명 있었는데 우산이 들어있는 상자를 항구에 두지 않고 배 안까지 가져갔더니 그들이 그것을 자기들의 방으로 들고 가는 것을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오키나와로 군수물자를 싣고 오고, 오키나와에서도 군수물자를 싣고 군물자를 베트남으로 가져갔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는우산을 쓰지 않기 때문에 선원들이 개인적으로 우산을 팔아서 돈을 벌었던 것 같습니다.
군표에서 달러로
내가 나하에 왔을 때는 B엔이라는 미군 군표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직 스무 살 정도였을 때 군표로 지불하고 증기선을 타고 나하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처음엔 미군 고용의 가드(경비원) 일을 했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의 월급은 그 군표로 지급됐습니다. 통화 전환 후 달러를 받게 된 것은 평화거리에서 가두판매를 했을 때였습니다. 내가 길거리에 서서 장사를 할 때 시장 아줌마들이 은행에 가서 B엔을 달러로 환전해 왔는데 달러가 어떤돈인지도 모르고 받은 기억이 납니다.
가부강의 범람과 개수 공사
가부강의 범람
개수 공사를 하기 전에는 비가 많이 오면 가부강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폭우나 폭풍이 몰아치면 가부강 주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가게에 가면 가슴 높이까지 물이 올라와 생명의 위험을 느꼈습니다. 기보가오카로 대피하기 위해 평화거리를 건너면 가깝다고 생각해 헤엄치면서 가곤 했습니다. 목조 2층짜리 파출소 건물에서 내가 헤엄치는 모습을 순경이 보고 "당신이 괜찮냐?"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젊었을때라 수영을 잘 했기 때문에 경찰관 두 명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괜찮습니다, 당신들이 오히려 위험해요”라고 말하면서 약 50미터 정도 산까지헤엄쳐 올라갔습니다. 주변보다 높은 기보가오카의 산까지 헤엄쳐 갔다가 거기서부터 걸었습니다. 국제거리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고 도로는 건조했습니다. 다음 날 폭풍이 지나가고 비도 오지 않아 가게에 갔더니 가게에는 아무것도 없고 진흙투성이였습니다. 그 때 우산 말고도 의류도 조금 취급하고 속옷도 팔고 있었는데 강이 범람하면서 전부 떠내려갔습니다.
지금의 나하상업고등학교 주변이나 국제거리에서 하코다테항까지는 통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미군이 철망을 치고 둘러쳐서 건널 수 있는 곳이 없었기때문에 가부강 수상점포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때부터 개보수공사를 요구하는 민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부강 치수 사업청원 활동
국제거리에서 농연시장까지 관계자 600명이 협력해 덕망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플래카드를 들고 당시의 류큐 정부에 청원했습니다. "이 가부강을 개수해 달라" “이 강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며 당시의 류큐 정부와 나하 시청에 2년 정도청원을 계속했습니다. 청원 당시의 리더는 오키나와의 출판사 사장인 마에시로 겐메이와 구로시오 다케히데, 야마시로 젠코 세 사람으로 입법위원은야마시로 젠코였습니다. 구로시오 다케히데는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고생을 했습니다. 요기공원에 모여서 류큐 정부에 갔습니다. 류큐 정부와나하 시청에 여러 번 청원했습니다. 나는 플래카드를 들고 뒤에서 따라다니기만 했으나 마에시로씨들은 행정주석과 나하 시장을 상대로 협상을 했습니다. 저는 30대 후반에 조합의 임원이 되었고 지금도 임원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가부강 개수공사가 시작되다
그 후 류큐 정부가 협상을 통해 USCAR(미국 민정부)로부터 공사비를 받았다고 합니다. USCAR가 관리를 했기 때문에 공사 중에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국제거리에서 농연시장까지의 상가에서 평화거리로 나뉘는 곳은 1구역 거기서 신에이거리로 니뉘는 곳까지가 2구역 거리서 가이난에서 내려가는 곳까지는 3구역 그 너머는 4구역, 현재 이렇게 4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공사는 2구역부터 시작되었고 마지막으로 농연시장 위쪽 구역의공사가 끝날 때까지 3~4년 걸렸습니다. 강 개수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가부강 청소를 해 달라고 당시 류큐 정부에 청원했습니다. 그 대신 가베강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강 공사뿐만 아니라 그 약속까지 받도록 청원했습니다. 가부강 위에는 반드시 국제거리에서 농연시장까지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강변에서 10미터 정도 땅을 파고 양쪽 편에 금속 말뚝을 박았습니다. 말뚝을 박지 않고 10미터까지 파면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0미터이상 되는 말뚝을 박고 난 뒤 팠습니다. 말뚝을 양쪽에 박고 처음엔 그렇게 깊게 파지 않았는데도 무너진 곳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전신주를 4, 5개박아서 공사를 했는데
지탱하지 못했기 때문에 금속 말뚝을 박았습니다. 말뚝이 부족하니 말뚝을 연결해 지탱할 수 있게 말뚝을 박은 후에 팠습니다. 기초는 10m 정도 아래를 콘크리트로 굳혀서 묻고
물이 많이 흐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에서 깔끔하게 콘크리트를 넣고 말뚝이 무너지지 않도록 콘크리트를 부어 넣은 다음 강을 복개하고 나서그 다음에 박아놓은 말뚝을 뽑았습니다. 콘크리트의 폭은 6미터 정도였습니다. 슬래브의 두께는 그렇게 두껍지 않았습니다. 가부강의 슬래브는 두께가 50cm 정도입니다. 슬래브의 폭에 대해 말하자면
가미하가초등학교 가미하라중학교의 암거 입구를 보면 슬래브의 두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과 오끼에이 거리의 준쿠당 부근까지 슬래브가 타설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하시 국제거리에서 오끼에이 거리의 준쿠당까지는 도로가 있습니다. 그 도로 아래는 가부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는 강 양변에 도로가 있었습니다. 그 가부강을 복개해 가부강 폭에 따라 도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강을 복개해 수상상가가 양쪽 강변의 도로와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1962년부터 3년에 걸쳐 가부강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가부강을 개수(암거화)한 뒤로는 더 이상 물이 넘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가부강 수상 점포 건설
수상상가 건설
수상상가 공사는 난공사였던 것 같습니다. 논의해서 건설은 난양토건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류큐 정부는 설계비를 내지 않았습니다. 국제거리에서 농연시장까지의 설계비는 내줬습니다. 하지만 건설 현장을 4구역으로 나눠 설계했습니다. 미국 국민정부와의 협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수상상점가 2층까지 설계는 당시 류큐 정부가 해줬습니다. 내 가게가 있는 곳은 위치가 좋다고 해서 쿠로시오씨가 중심이 되어서 3층을 증축했습니다. 그리고 쿠로시오씨는 농연시장에 큰 가게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농연시장이 있는 4구역도 3층까지 만들었습니다. 1구역과 3구역은 3층 부분이 없습니다. 류큐 정부의 지시에 따라 설계를 해서 2층까지 만들었습니다. 우리 2구역도 2층까지는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조합에서 설계를 의뢰해서 3층 부분은 나중에 만들었습니다. 가부강 공사 당시 새로운 수상상가의 셔터는 튼튼했습니다. 지금의 셔터는 약합니다. 원래는 셔터가 똑바로 서는 것인데 이렇게 경사지게 만들면 셔터는 몇 배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건축법상 셔터 기둥은 원래 똑바로 세워야 합니다. 일반적으로셔터는 수직으로 내려놓는 것이지만 당시 셔터는 이 정도 경사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 경사가 있으면 똑바로 세우는 것보다 세 배 강하다고 합니다. 류큐 정부가 설계한 셔터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셔터 기둥이 조금 기울어져 있습니다.
수상상가가 완성되어 기뻤습니다. 그 후 폭우와 폭풍이 있었지만 내 가게 앞의 올라온 물은 15cm 정도였습니다. 가부강 주변이 나하의 명소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곳은 전부 늪이었습니다. 소만에서 만종의 시기에는 늪지대라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물이 고여 밭도 못 만들고 산도 못 만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수상상가와 거리의 변천
남양토건이 공사를 맡은 후부터 각 점포 주인들이 스스로 평수를 나눠서 수상상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상상가의 건물은 국가 또는 시 소유로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개인 소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류큐 정부는 돈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내 소유 공간은 작았지만 다른 곳을 임대해 크게 사용했습니다. 가장 큰 것은 약 25평 정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상 점포를 산 사람은 대부분 임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땅의 소유주는 임대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임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상 점포를 직접 만들어서 지금도 직접 가게를 하는 사람은 10명도 안 됩니다. 내 가게가 있는 2구역의 경우엔 그렇습니다. 수상상가는 모두 가게를 하던 사람들의 소유입니다. 하지만 이제 50년 이상지났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가게 위치가 좋아서 매수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주인인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많은데 지금 수상상가의 주인들은 산 사람도 많고 물려받은 사람도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