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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시마쿠투바로 들려주는 오키나와 연극 이야기

movie_play
  • 19331940년생
  • 세나하 타카코(瀬名波 孝子)

TIMELINE관련 연표

1933
나하시 구모지에서 출생.
1942
타마스쿠스 세이기가 좌장으로 있는 신라쿠좌에 입단하여 첫 무대에 오르다.
1944
10·10 공습으로 가족과 함께 나하에서 나키진의 산속으로 피란.
1947
시마부쿠로 코유의 ‘소나무극단’ 입단. ‘오쿠야마의 모란’ 주연 출연.
1948
이라하 인키치의 ‘매화극단’ 입단.
1953
타마스쿠스 세이기 고문, 마키시 코추가 대표로 있는 ‘도키와좌’ 입단.
1954
남편 마쓰모라 코에이와 극단 ‘미쓰와좌’ 결성.
1960
영화와 TV의 보급으로 각 극단의 흥행이 부진해짐에 따라 ‘미쓰와좌’도 해산.
1966
오키에이 본관 연극에 레귤러 출연 여배우로 계약. 연일 무대에 출연.
1999
오키나와현 지정 무형문화재 ‘류큐가극’ 보유자로 인정받다.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오키나와의 연극인. 오키나와 전쟁 전, 나하의 신라쿠좌에서 첫 무대에 오르다. 전후, 다양한 극단에서 경험을 쌓은 후 연기자로서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많은 관객을 매료시켰다. 가극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연극의 매력을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서며, 후학을 지도하기도 한다. 오키나와현 문화공로상, 오키나와예능연맹 공로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

전시 오키나와 연극과 전쟁 체험

여러분 안녕하세요. 세나하 타카코입니다. 나는 1933년 1월 16일생으로 올해 90세가 되는 할머니입니다. 전쟁 전 구모지에서 태어나 남매는 남자 셋에 나 하나가 여자이고어머니는 혼자서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전쟁 중 오키나와 연극의 상황

내가 어렸을 때 (신라쿠자 연습을 위해) 다이쇼 극장에 다닐 때 마침 전쟁이 시작되어 (배우들은) 60세 이상의 선배들만 남았고 젊은이들은 모두전쟁에 동원돼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사람만 가지고는 약동감 있는 연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한다고 해서 나는 아역으로 뽑혔습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힘내라는 내용의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한 구절만 기억하고 있는데“쇼와17・18년 대동아전쟁 결전의 때가 왔다" “자 결전이다 결전이다”라고 하면서 빨간 의상과 반바지를 입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통조림 하나”라든가 “부모와 자식의 이별”이라든가 다 기억이 안 나지만 주인공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잠잘 곳이 없어서 연극 오두막에서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군인들이 들어오면서 연극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을 위문하러 가자고 해서  “난다키부시” 를 외워 낮에연습을 하고 다음 날에 위문 간다고 할 때 10・10공습 The October 10 Air Raid가 있었습니다. 

10・10공습을 체험하다 북부로 피란

그 뒤로는 전쟁에 쫓겨서 10・10공습으로 집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도마리에 머물 수 없게 됐습니다. 구모지에서 오타로 옮겨와 도마리에서 10・10공습을 겪고 그 후에 도망쳐 온 곳이 기노완이었습니다. 기노완으로 갔지만 학교에 갈 수 없었고 곧 기노완이 격전지기 되어 일본군이 이번엔 나키진으로 가라고 해서 기노완을 아침 8시에 떠나 저녁 8시까지 계속 걸었습니다. 긴에 있는 초등학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으로부터 주먹밥 한 개와 다쿠안 하나를 공급받아 계속 걸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버텨냈습니다. 전쟁 중 고생 이야기를 하면 산에 있을 때는 어떤 것이든 간에 풀이면 뭐든지 김처럼 생긴 모아사도 뜯어먹고 쥐나 개구리도 먹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었습니다. 연기가 나면 총알이 날아오기 때문에 불을 피울 때 연기를 내뿜으면 안 된다고 해서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는 썩은 나무를 태워 밥을 지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지혜롭게도 쌀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녔어요. 산에서 아군(일본군) 병사들을 만났는데 “밥을 지어 달라”고 양말에 담은 쌀을 가져왔습니다. 산에는 물이 있어도 고이지 않았는데 오빠들이 산에 있는 나무를 묶어 수돗물처럼 물이 고이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병사들은 “좋은 생각이다, 우리 것도 부탁한다”고 해서 병사들 것도 밥을 지어줬습니다. 

그 후의 전황은 함포 사격 소리가 점점 심해져 오키나와를 새까맣게 둘러싸듯이(미군) 군함이 오고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산에서내려와라" "병사들도 산에서 내려와서 살아남아라" "산에 있으면 함포의 희생이 될 수밖에 없으니 빨리 내려와라" 미군이 (항복을 촉구하는)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믿은 사람들은 우리를 포함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대로 산에 남았습니다. 산에서 내려가자 미군들에게 잡혀 나키진에 있는 여기저기 집에 배치되었는데 그곳에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자들이 많이 수용된 곳이 하네치캄판 (수용소)였습니다. 하네치 수용소에는 오빠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하네치 근처의 가부소카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서 캄판(수용소)에 있는 오빠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친척 아주머니의 아이가 산에서 죽었다고 해서(아주머니를) 도와주려고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밤에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미군이 일본군으로 오인해 어머니는 발에 미군의 총을 맞았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남동생 둘만 남게 돼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식사는) 죽과 매실 장아찌 하나로 배고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키진에 있었을 때는 미군으로부터 통조림 등 식량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식량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큰일 났다는 생각에 오빠들이군대에서의 일을 마치고 GMC(미군 트럭)가 과자나 음식을 던져주는 것을 길에서 기다렸다가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전후의 부흥과 극단

예능의 부흥과극단 결성

그 후 나하의 긴만과 이시카와의 수용소로 나뉘어 배치되었습니다. 우리는 긴만 수용소로 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시카와에 배치되었습니다. (시마부쿠로) 코유 선생님이 이시카와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긴만에 있었을 때 코유 선생님이 전후에 배우협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나는 지금도그때의 여권(협회 회원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라는 극단이 생겨 나는 소나무 극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내가 어렸을 때 가르쳐 주신 (오야도마리) 겐세이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겐세이 선생님이) "살아있었구나"라고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드디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연극에 데려가서 긴만 위에 있는 구시가와에서 소나무극단이 창단했습니다. 나는 소나무극단에들어가 막잡이 일이나 작은 춤을 췄습니다. 그때 선배들이 연기한 것이 “오쿠야마의 모란”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 들어가 마침 외딴섬 공연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지마와 이헤야 쿠메지마를 전부 이동 공연으로 돌았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떠나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돈 같은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른은 한 되, 아이는 다섯 홉의 쌀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젊은 배우로서 모든 연극에 도전하다

다른 언니들은 “오쿠야마의 모란” 이야기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워서 아무도 (대역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나는 잘 몰라서 “노래를 아느냐”고 묻기에 그냥 무모하게 손을 들었을 뿐인데 “이 아이에게 시켜보자”라는 얘기가 나왔고 히가 세이기 선생님이 “이 아이는말괄량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가발을 쓰고(성인 여성처럼) 허리와 가슴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을 잡는 장면도 낮에 배우고, 밤 (연극) 공연에서 했더니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뒤로는 여러 배역을 맡아 히가 선생님의 쥬리juri(유곽의여인) 역이라든지 술주정뱅이 같은 역할도 연기하면서 (나는)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매화극단에 계셨던 제 스승이기도 한 타마구스쿠 세이기 선생님이 "내 제자이니 이쪽으로 오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매화극단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헨잔 에이타로 선생님, 이라바(윤키치) 선생님 등 훌륭한 배우 선배님들이 계시는 가운데 헨잔 에이타로 선생님과 마침같이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16살이었지만 “모모위안과(Momoui anguwa, 桃売乙女)”의 산라과(Sanraguwa, 三良小)를 맡았습니다. 난게쓰무극단이라는 극단이 있었습니다. 헨잔 에이타로 선생님은 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으로 음악과 노래, 춤 등을 공연해 손님을 많이 불러 모으려고 했습니다. 헨잔 에이타로 선생님의 부인이 서커스단 출신으로 “지나의 밤”의 노래와 춤 등 여러 가지를 선보이는데 "걸을 때는 이렇게 걸어라"며 걷는 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연극을 하는데 왜 이런 식으로 걸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15, 6살의 육상부와 배구부 선수였기 때문에 운동은 정말 좋아했지만 몸을 뒤로 젖히거나 다리를 쭉 뻗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헨잔 선생님의 부인과 함께 공연했고 그때부터 점점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다마구스쿠 세이기 선생님이 류큐 무용에 몰두한다며 난게쓰 가극단을 그만두기 전에 “토키와좌”를 창단했습니다. 그 전에 나하 극장에서 소나무 대나무 매화 극단이 합병하여 큰 상설 극장을 만들겠다는 선생님들의 구상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시마부쿠로 코유 선생님, 마지키나 유코 선생님 타마구스쿠 세이기 선생님, 미야기 노조 선생님, 다이라 료쇼 선생님 등 거물급 배우들이 계셨는데그분들이 간부가 되어서 교대로 상설공연을 하고 손님 유치 경쟁을 하려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수익은 선배들이 다 가져가고 하급자들은돈을 받지 못해 젊은 배우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때 배운 것이 “하야쿠두치”입니다. 당시 젊은 배우들 중에 하치키 마사오, 우네 신지로 씨 등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너도 배워 두라”고 해서 나도 배웠습니다. 

오키나와 연극의 흥륭과 변천

극단의 증가와경쟁의 시대

그 무렵부터 모두 헤어져 경쟁하듯 극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우에마 쇼세이 선생님 등이 결성한 신오키나와좌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당시 “도키와좌”에는 훗날의 남편(마쓰모라 코에이)도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다마구스쿠 세이기) 선생님도 계셨기 때문에 저도 선생님을 따라 “도키와좌”에 들어갔습니다.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도키와좌는 해산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 각지에 30개나 되는 극단이 생겨 연극으로 경쟁했습니다. 각 극단은 돈이 없으니 연극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여러 가지 연극 중에는 “재봉틀 유령”과 같은 유령극도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아와 모리노부씨 등이 유령극을 했습니다. 이게 엄청나게 흥행했다고 해서 이번에는 유령연극으로 경쟁을 벌였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약 30개의 극단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류큐신보사가 콩쿠르를 주최하여 연극을 겨루게 되어 그 뒤로는 각 극단이 땀을 흘리며 다른 극단에게 질 수는없다고 열심을 다했습니다. 

당시에는 배우가 10명이면 큰 극단이었고 보통은 많아야 7명 정도였습니다. 극단을 가지고 있어도 작은 극단이었기 때문에 연극을 할 때도 혼자서 여러 배역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남자 역할도 하고 할머니 역할도 하고 주연을 바꿔가며 창극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배역을 소화한것이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극단 “미쓰와좌”를 만들어 무엇이든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텔레비전이 나오고당시에는 흑백 텔레비전이었지요. 그 다음엔 오키에이 본관(오키에이 연극)이 오픈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극단이 해산되고 극단도 사라져 갔습니다. 

연극용 화장에 관한 사연

당시 화장은 아연백을 사용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치하라 선생님이라는 의사 선생님이 계셨는데 치하라 선생님이 하얀 가루면 좋다고하시면서 피부약인 아연백 가루가 있어서 그걸 선생님께 받아왔습니다. 그것을 얼굴에 바르고, 당시에는 눈썹을 그리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사용한 성냥을 사용해서 그걸로 눈썹을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지혜가 생겨서 냄비 그을음을 그것을 돼지 기름과 조금 섞으면 바로 눈썹먹이되었습니다. 하지만 울면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렸습니다. 그 방법을 누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립스틱은 미국인 가정에서 가정부 일을하는 사람이나 미국인과 결혼한 사람한테 립스틱을 하나 얻어서 다 같이 썼습니다. 치크는 깨진 붉은 기와를 돌로 긁어내면 가루가 됩니다. 이 가루를 뺨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전쟁 전부터 전쟁 후까지 화장은 흰 분을 바르고 눈썹과 립스틱만 있으면 됐습니다. 

오키에이 본관에서의 대규모 연극

이런 화장이었지만 오키에이 본관에서의 오키에 연극에 들어가면 카와지 류코씨가 다카라즈카극단에서 오셔서 미수미 하루오씨가 연기 지도를 해준다고 해서 "토마리아카(Tumaiaka)”의 엄마 역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이 엄마 역의 후보자가 몇 명 있었습니다. 이토수 카메씨와 오야도마리 겐세이씨의 아내 등 다섯 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 중 내가 가장 젊고 이제 막 29, 30살이 됐습니다. “젊은 엄마 역은 이 사람이 좋겠다”고 해서 내가 뽑혔습니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오키나와에서는 배우가 월급제로 돈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의 연극에서는 무대 배경막이 다섯 가지 정도밖에 없었는데 오키에이 본관의 배경막은 24 가지나 되고 막이 바뀌는장면도 있어서 "오키나와의 연극도 이제 영화 같은 연극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키에이 본관 극단에 들어가기 전에는 라디오 오키나와의 “향토극”에도 출연했었습니다. 그게 주 1회로 수입이 적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오키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극과 달리암전도 있고 24장면이나 돼서 그것을 외우는 게 힘들고 대본도 이렇게 두꺼웠습니다. 대본을 외우는 기간은 일주일이었습니다. 당시 무대장치를 신조씨가 만드는 동안 우리는 쉬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1주일 동안에 대본을 외워야 했습니다. 집에서 쌀을 씻으면서 노래를 부르면“엄마 뭘 하세요?”라고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로 집에서 노래를 불러도 다 외울 수 없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한달간의 “투마이아카” 롱런 공연은 대성황을 이뤘지만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자 오키에이 본관의 손님이 갑자기 줄어들었습니다. 오키에 사장은 화를 내며 "텔레비전 때문에 손님이 오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위한 촬영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 며 TV 방송 수록을 못하게 했습니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찍는 것이 좋다" 고 사람들이 말하면 사장님은 “그렇게 하자”고 해서 촬영했더니 손님이 급감해서 사장님은 "절대로 촬영하지 않겠다" 며 그 후로는 TV 녹화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시장에 가면 가게 사람들이 "이번 연극이 좋았다" 등의 말을 들었습니다. 역시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후까지 나하극장에는 “3월 놀이” 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하극장에서 3월 공연을 하지 않으면 수익이 나지 않는다” 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팬들이 옷감이나 선물에 이름을 써서 그것을 축의금으로 무대에 던져 넣었습니다. 연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선물로 무대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 일이 오키에에서는 없어졌습니다. 

오키에이에서는 유령연극을 연기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단바시”입니다. 연출을 위해 무대 위에 수십 톤의물을 놓고 실제 물을 흘려서 모형으로 만든 마을 집들이 무너져 내리는 연출이 있었는데 마치 영화 같았습니다. “오키나와의 극장에서도 이런연극을 할 수 있구나”라고 감동했습니다. 본토에서 말하는 노송나무 무대 같은 훌륭한 무대에 설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야시로 시키치 사장은 나에게 "나는 미야시로 시키치라는 이름을 남길 거라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내가 아니라 다카코, 너야말로 이름을 남기게 될 테니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객이 가장 많았던 것은 “마단바시”였습니다. 특히 “오쿠야마의 모란”은 특별합니다. 내가15살 때 출연했지만 당시에는 그저 노래를 불렀을 뿐 이 연극의 내용을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아이를 낳고 이별의 아픔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후였고 그게 진짜 연극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게 롱런 공연이 되어서 한 달과 수십일 동안 40일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지만공연은 만석이었어요. 나에게 연극이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이득이 됐습니다. 어떤 배역이든 “못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령을 소재로 한 연극 공연에서는 “저기는 물에 잠겨서 진짜 귀신이 나온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라하 사에코씨, 카네시로 미치코씨 등주연급 배우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안 한다면 내가 할게" “살아있는 사람이 귀신에게 질 수는 없지” 하면서 “오시마이마조과” ”오시마칸쓰미” “거꾸로 선 유령” “지칸지의 일곱 무덤” 그리고 “시치난다의 유념불” 등 유령연극은 전부 다 해봤습니다. 내가 거리를 다닐 때면"당신은 항상 귀신 연극만 하고 있으니 아예 유령 다카코로 이름을 바꿔라"고 동네 사람들이 다 웃으면서 다음 공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연극을 보는 분들과 담소를 나누는 게 즐거웠습니다. 

무용 스승의 가르침

“무용을 가르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보통 사람에게 가르치는 경우, 연기자에게 가르치는 경우, 유곽의 여인에게 가르치는 경우" "세 가지의 가르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너처럼 무대에 서는 사람은 이렇게 크게 춤을 춰라" "유곽의 여인의 춤은 3자의 넓이에서 출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쉽게 춤을 출 수 있게 해야 한다" "너는 무대인이니까 크게 춤을 추어라" 춤 선생님이말씀하신 그 가르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연극을 생각하다

우치나구치 와 오키나와 연극

오키나와 연극 안에는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의 침구쿠루(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가무극 등은 옛날 작품이기 때문에 전부 우치나구치(오키나와 사투리)인데 내가 “우치나구치를 사용하라”고 말하는 것은 오키나와의 문화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고 전 세계에 우치나구치를 남겨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우치나구치를 “시마쿠투바(고향의 말)”로서 남기려고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손뼉을 치며 감탄하고 있습니다. 우치나구치를 모두가 이해한다면 오키나와 연극도 더 재미있어집니다. 말을 모르면 아무 뜻도 알 수 없고 오키나와 연극을 봐도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우치나구치를 배워서 전 세계에 퍼뜨려서 세계 각지에서 우치난추 대회가 있지 않습니까?거기서 우치나구치로 무엇이든 말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브라질에서는 어머니를 “암마” 아버지를 “수”라 부른다고 하는데 우치나구치가 가장 많이남아 있는 곳이 그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을 하다 보면 우치나구치 중에서도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야마하라 말로 “어머나 우리마사루가 넘어졌네”라는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야마하라 말, 나하 말, 그리고 연극 속에는 슈리 말도 있습니다. 슈리 극장에서 사극을 했을 때 "어머, 그렇군요, 이런 걱정이 있었군요"슈리 말은 말투도 다르고 억양도 전혀 달랐습니다. “슈리성 탈환” 사극을 슈리에서 공연하면 슈리의 할머니들이 분장실에 와서 "당신들이 쓴 말이 틀렸어” "이렇다 저렇다" 그렇게 가르쳐 주신 것도 하나의 공부가 됐습니다. 오로쿠에는오로쿠 말이이토만에는 이토만 말이 있습니다. 오키나와 연극을 보면 다양한 지역의 언어(시마쿠투바)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가극의 한 장면

오키나와 가극의 한 장면 “이에지마 한도과” 실연

뱃사공(한도과가 아닌가) 

한도과(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한다)

뱃사공 (남자를 만나 지금까지의 마음을 이야기해 보겠다고)

뱃사공(집을 나갔는데 어떻게 된 거냐?)

뱃사공(남자를 만났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한도과(만나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도과 (원통하게도 내게 한 말은)

한도과 (인연도, 애정도, 모든 게 다 흩어져 버렸어요)

한도과 (예전에 한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다오)

한도과 (그건 잠시 동안의 여행의 외로움 때문에)

한도과 (함께 했을 뿐)

한도과 (지금부터는 인연도 애정도 없는)

한도과 (애정이 없던 시절의 인연이라고 포기하고 잊어다오)

한도과 (네가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 아니라며)

한도과 (나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어요)

배우로서의 경험으로부터

무대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인간은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겁을 먹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진지하게 헤쳐 나가야 합니다. 겁을 먹으면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내가 전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없다고 말하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해보고 보여줘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나는 무엇이든 “예”라 대답하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대역을 찾을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 대신할 사람 없나?" "예, 내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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