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고자의 식문화와 생활
- 19441940년생
- 쿠토미 세이지(徳富 清次)
TIMELINE관련 연표
1944 |
가고시마현 키카이지마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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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구이쿠무라 촌장과의 교섭을 통해 미군인, 군무원을 대상으로 한 상업지 비즈니스 센터 구상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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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구이쿠무라 데루야(현 오키나와시 데루야)에 ‘뉴욕 레스토랑’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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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고자의 센터 거리에 동일한 이름으로 분점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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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
미군 공인 음식점 등에 발급되는 영업허가증 ‘A사인’ 제도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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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뉴욕 레스토랑 메뉴에 A런치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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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고자 소동(폭동) 현장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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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오키나와 시정권이 일본에 반환되다(일본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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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센터거리에 위치한 뉴욕 레스토랑의 오너가 되다(~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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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상점가 명칭이 ‘센터 거리 상점가’에서 ‘오키나와시 주오파크애비뉴’로 변경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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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작은아버지가 창업한, 전후 고자를 상징하는 가게 ‘뉴욕 레스토랑’에서 미국의 식문화를 접하다. 센터 거리에 위치한 동명의 레스토랑에서 1972년부터 2008년까지 오너를 맡았다. 군기지가 위치한 도시의 모습, 상점가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 시대에 따른 미군인의 변화, A사인 제도, 고자의 식문화 등 고자라는 도시의 변천을 지켜보아 왔다.
키카이 섬에서 고자로
섬 아이들의 생활
나는 아마미오시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학교까지는 4킬로미터나되는 거리였지만 걸어서 다녔습니다. 아침 6시쯤에 마을을 나와 맨발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기카이도에서 고자로
아자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에는 부두가 없었기 때문에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 큰 배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상륙했습니다. 상륙할 때는 무릎높이까지 바닷물에 잠긴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아자의 상가를 지나서 1호선(현 58호선) 도로에 있는 터널을 지나서 올라간 곳에서 버스를 타고 고자(현 오키나와시)로 가는 시대였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가족보다 먼저 고자에 나와 계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이가 6명이었지만 나와 여동생 둘,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왔습니다. (처음 본 고자의 인상은) 무서웠습니다. 덩치 큰 미군 병사들이 많아서 무서운 도시였습니다.
창업 시 '뉴욕 레스토랑'
뉴욕 레스토랑 창업자 모토야마 카시토미씨
(삼촌인 모토야마 가시토미씨) 그분은 신사였습니다. (삼촌은) 아이들에게 미국식 교육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배운 대로 하지 않으면아버지한테 혼이 났습니다. (삼촌은) 시내에 나갈 때는 단정한 차림새로 모자를 쓰고 망토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거리를 걸었습니다.
초기에는 샌드위치가 메인 메뉴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입업자와의 관계로 스테이크 고기가 대량으로 들어오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햄버그 스테이크는 다진 고기를 사용하는데 직접 다지기 기계를 돌려서 다진 고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레스토랑과 거리 풍경
(가게 일은) 설거지를 하거나 얀바루에서 트럭으로 사온 장작을 패는 일을 했습니다. 장작 패는 일과 설거지 정도만 했습니다. 그 당시 미군병사는 신사였어요, 오키나와 전쟁이 끝난 후의 미군은 거리를 걸을 때는 깔끔하게 차려 입고 셔츠의 단추도 제대로 잠그고 신발도 깨끗하게닦고 다녔습니다. 당시 이발소가 많았습니다. 이발소의 주인만 면허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발소가) 많았습니다. 미군들은이발소에 먼저 들려 이발을 하고 나서 시내로 놀러 갔습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미군들에게 손을 내밀면 그들은 초콜릿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영화를 보고 싶어서 영화관 앞에 서 있으면 (미군이) 손을 잡고 함께 영화관에 들어가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교회에 갔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목적은 초콜릿이나 과자를 받으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미국 사람들로부터 과자를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레스토랑의 메뉴에 대해
소고기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스테이크에 쓰는 고기는 지육 형태로 왔습니다. 지금처럼 갈비나 안심 등 부위별로 들어오면 좋겠지만 (지육 형태로) 수입됐습니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돼지고기의 경우 좀처럼 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와이에서 보내온 돼지 덕분에 (양돈업이 부활하면서) 런치 메뉴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C런치입니다. C런치에도 커틀릿을 넣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토요일이나일요일이 되면 정육점을 몇 군데나 돌아다녔습니다. 그 정도로 (돼지고기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돼지고기를) 원활하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런치메뉴는 C에 이어 A가 생겨 B부터 C까지 종류가 생겼어요. C런치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금 50대 60대 사람들은대부분 C런치를 먹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C런치를 먹어본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식당이 있던 상가 사람들, 소위 말하는 센터 거리는 장사가 잘 되고 부모님들이 장사하느라 바빠서 “뉴욕 레스토랑에 가서 C런치라도 먹고 와라”그런 말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당시 C런치는 35센트 정도였고 오키나와 소바가 25센트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고급이긴 했습니다. B런치는 약 50센트 A런치는 이른바공무원의 보너스가 나왔을 때의 송년회용 메인메뉴였습니다. 그 정도로 비쌌습니다. 60센트에서 65센트 정도였습니다. 스테이크는 비싸도 300그램 90센트 정도 그 외에 비쌌던 것은 치킨이었습니다. 치킨이 80센트 정도의 가격이었으니까요. 75센트에서 80센트, 70센트 정도였을지도모릅니다. 그만큼 비쌌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치킨은 좀처럼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습니다. (그 치킨은) 프라이드치킨을 말합니다. (프라이드치킨은)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호스티스에게 주는 선물로 많이 팔렸습니다. 오키나와 사람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술집 등) 그런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어 호스티스의 가족은 선물로 받은 치킨을 잘 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50~60대 사람들은 당시 치킨을 많이 먹었을 겁니다. (레스토랑에 오는)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의 메인 요리는 계란 3개였습니다. 베이컨 에그나 햄 에그의 경우 계란이 최소 3개 이상 손님들 중에는 5개나 더블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계란도 부족했습니다.
A사인 제도하에서
야채 조달과 A사인
군의 지정을 받으려면 역시나 엄격했습니다. 당시 야채를 파는 곳은 오키나와 물산이라고 해서 나카구스촌 사무소를 지나간 언덕에 오키나와 물산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야채 수입업자였습니다. A사인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곳의 야채를 써야만 했습니다. (증거로) 그곳의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현내의 조달처로 지정된 곳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채소를 사용해도 된다는 곳은 도미심로의 나카치였습니다. 그 일대의 야채는 미군이 허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선한 야채는 미군도 쉽게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A사인의 종류
(A표지판의 색깔은) 직종에 따라 다르고 음식점은 빨간색이었습니다. 식료품점인 정육점이나 빵집은 검은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A사인바 등은 파란색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현관 앞의 표시입니다. 그것을 보고 (손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A 사인이) 보이면 미군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A사인의 표시 위치는) 현관 앞과 가게 안에 하나씩 두 군데입니다. (미군의 불시 검사가) 어느 한 가게라도들어가면 "검사원이 왔다"며 모두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특히 음식점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깨끗하게 청소해야 했습니다.
A사인 인증과가게 사람들
예를 들어 A사인을 받고 장사를 하는 사람은 먼저 류큐 정부 보건소의 허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도 1급을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미군보건소가 검사를 해서 (기준을 충족하면) (미군 공인 점포로서) 영업이 허가되었습니다. (미군의 불시 점검이) 갑자기 일주일에 두 번 오니까검사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식품 위생과 공중위생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검사는) 엄격했지만 예전에는 느슨한 제도밖에 없었고 현지 상인들도 다 대충대충 했지만 (A사인 제도 하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엄격했습니다.
미국의 식문화
양식의 시작은 고자(오키나와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햄버그스테이크와 피자 애플파이 그리고 타코와 타코라이스 같은 것은 아버지 시대인1950년대에는 이미 있었습니다. 다만 고자 주변 사람들만 그런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 사람들은 먹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 미국 사람들은 먹었습니다. 스테이크용 고기는 뉴질랜드와 호주 그것을 수입한 것은 하와이에서 온 오키나와계 교포2세들이었습니다. 하와이 사람이경영하는 이바노미트라는 회사였습니다. 일본으로 복귀된 후에는 일본의 대기업인 마루베니 등 일본 회사와 계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은 직접 수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이바노 사람들은 하와이로 갔습니다.
고자의 거리와 사람들의 생활
고자의 거리와 센터 거리
(당시 상가에는) 조합이 있었고 조합은 비교적 활발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이 가져온 달러와 B엔(미군표)을 교환하는 곳도 조합에서 운영했습니다. 그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달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가게에서 미군이 B엔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 달러는 들키지 않도록 숨겨 두었습니다.
왜 고자의 센터 거리가 만들어졌는가 왜 그런 상가가 필요했는가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시민회관 뒤편에 예전에 야에시마라는 술집 거리가 있었는데 (길이는) 약 300미터 정도로 엄청나게 번창했었습니다. 밤에는 매일 보행자 천국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술집 외의 업소도 있었습니다. 미국 국회의원이 왔을 때“이런 업소는 안 된다”고 해서 그 거리 전체가 오프 리미트(출입금지)가 됐습니다. 그래서 미군들이 놀 수 있는 장소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 지금의 센터 거리와 게이트 거리 안쪽 일대가 전부 기지였기 때문에 당시 촌장이 그 지역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미군의 물음에 대해 비즈니스 센터를 만들기로 했고 영화관이나 롤러스케이트장, 기념품 가게 등 그런 곳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것이 (센터 거리의) 시작입니다. 그 후 야에시마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술집을 하던 사람들이센터 거리와 게이트 거리(나하)의 나미노우에로 옮겨 왔습니다.
그 당시 센터거리에는 아직 테일러(양복점)가 없었습니다. (양복점이) 있던 곳은 데루야입니다. 흑인을 대상으로 한 양복점이었습니다. (기노완의) 후텐마나 이사 이남에서는 대만과 홍콩계 사람들이 양복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백인과 오키나와의 부자들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바느질하는 사람은 대만계나 오키나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느질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바쁘게 일하면서 3일~4일 만에 정장을 완성했었습니다. 흑인 거리는 처음에는 시로마에에 있었지만 시로마에로부터 데루야로 옮겼습니다. 왜 데루야로 옮겼냐면 센터 거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이 데루야에서 센터 거리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제 그 자리에 흑인들이 옮겨온 것입니다. 그래서 술집도 생기고 양복점도 생겼습니다. 이발소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옛날 미국 영화 등을 보면 남자들은 자주 이발소에 가지요. 서부극에서도 산에서 돌아오면 바로 이발소나 목욕탕에 가지요. 역시 미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놀러 갈 때는 (몸을 단장하는) 그런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시계와 카메라가 폭발적으로 팔렸습니다. 돈이 있는 (미군들은) 좋은 일본제품을 사거나 시계는 오메가나 롤렉스 등을 구입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들은) 파병될 때까지의 한정된 기간에 돈을 다 써버리면 (소지품을) 전부 전당포에 맡겼습니다. 그래서 파운숍(전당포)이 많이 생겼습니다.
기지의 도시와사람들의 생활
난민(나미노우에)이나 후텐마 고자(오키나와시), 가데나 등 (미군기지가 있는 마을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고 생계를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며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미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변(기지촌) 사람들에게는 말이죠. 나하 사람들도 고자 쪽으로 와서 나하의 도매상들도 고자에서 많은 소비를 했습니다. 또 우리 고자 사람들은 고자의 가게에없는 것을 나하의 공설시장이나 도매상에 가서 사 왔습니다. 그래서 고자 시내에는 많은 달러가 들어왔습니다. 그 돈으로 나하에서 쇼핑을 하고 나하도 그 돈으로 풍요로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자에서는 미국 제품을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 마요네즈는 EGGO라는 마요네즈그리고 케첩은 HEINZ, 치약은 Colgate입니다. 그런 제품들은 고자에서 여전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고자에서는 미국제품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다.
1960년대센터 거리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3년 당시에는 국가 공무원이나 현의 공무원의 월급은 35달러도 안 됐습니다. 군 고용인의 경우 월급이 40달러 이상, 45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0달러의 차이입니다. 그 차이가 컸습니다. 오키나와 소바는 25센트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았을 때당시에는 공민관 같은 데서 피로연을 했는데 축의금은 3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10달러의 차이는 컸습니다. 그래서 관공서에서 일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버지 가게에서는 1달러로 300g짜리 스테이크를 먹으면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가장 성수기에는 하룻밤에 2000달러를 벌었습니다. A사인이 있는 큰 술집에서는 5000달러 정도 벌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이 3000달러를 내면집을 지을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옛날 센터 거리의 네온사인을 보십시오. 멋진 네온사인으로 도쿄의 긴자 못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가게들은) 네온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거리 밖의 사람들은 센터 거리의 번영을 보고 돈이 금고에 다 들어가지 않아 드럼통에 넣었다는 소문을 퍼뜨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됐습니다. 물론 계산대에는 다 들어가지 않습니다. 1달러짜리부터 큰 금액의 지폐까지 다양해서 계산대에 (가게의 돈이) 다 들어가지 않는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드럼통에 넣었다는 얘기는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가게에서) 그 정도의 돈을 썼다는 뜻이지요.
베트남 전쟁의 영향
베트남 전쟁과 거리의 변화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후에는 아주 친절한 미군 때문에 장사도 비교적으로 쉬웠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자 (미군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야만적이라고 해야 할지 (놀라울 정도로 변했고) 역시 전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센터거리의 외국인 상대 가게에서는 처음엔 다들 사교댄스를 즐기고 있었어요. 옷을 차려 입고 술집에 가서 주크박스를 틀어놓고 사교댄스를 합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자에는 댄스홀이 많이 생겼습니다. (외국인들은) 밤이 되면 여자도 남자도 댄스홀에 가서 춤을 추고 그러다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셨습니다.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도 외국인이 술 마시는 방법을 따라 주크박스를 틀어놓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어요. 지금 70대 이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사교댄스를 아주 잘 출 것입니다. 왜냐하면 춤을 못 추면 남자는인기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시대가 지나고 1960년대에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자 미군들은 오키나와에서 많은 돈을 썼습니다. 나하의 나미노우에를 포함해 기지가 있는 모든 도시가 그랬지만 특히 센터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매우 붐비고 혼잡했습니다. 사건도 많았기 때문에 미군 헌병이 2인 1조로 순찰을 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싸움이나 트러블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리의 음악은 주크박스에서 라이브 연주로 바뀌었습니다. 오키나와시가 고자였던 시대에는 재즈 노래와 연주가 많았습니다. 재즈가 유행한 다음에는, 벌거벗은 여성(의 춤)이었습니다. 여성분들에게는 실례지만 도쿄나 오사카에서 댄서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오키나와에 오려면) 여권이 필요했기 때문에 댄서들은 석 달 동안만 오키나와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댄서 전문 프로덕션이 나미노우에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외국인(미군) 중에는 정신이 나간 사람들도 있어서 마약이나 별별 짓을 다 했습니다. 그 시기가 지나 이제는 락이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변화로 필리핀 여성 댄서들이 오기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필리핀 밴드가 왔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거리의 모습이 변해 갔습니다.
베트남 파병미군 병사를 배웅하다
나는 가데나 기지에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세 사람을 배웅했습니다. 아버지 가게는 8시에 오픈하는데 매일 가게 문을 열자마자 바로 (손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레스토랑 안에는 카운터 바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아침부터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카운터에서 밥도 먹습니다. (그들도) 매일 오는 손님이었기에 나와 아버지와 웨이트리스도 모두 함께 그들이 베트남에 갈 때면 배웅을 하러 갔습니다. 3명 정도베트남에 갔습니다. 그들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쌍했습니다. (가게에) 올 때는 아주 즐겁게 떠들고 돈도 아낌없이 쓰면서매우 즐거워 보였습니다. (베트남에) 가게 되자 허탈해하고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배웅한 병사들은) 20대였습니다. 저도 20대였습니다. 인종차별도 좋지 않지만 전쟁은 절대로 전쟁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끔찍합니다. 전쟁은 인간을 망가뜨립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전쟁에서는) 사람을 죽게 되지요. 멀쩡한 상태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고자 소동 과미군 병사에 의한 사건・사고
고자 소동(1970년)과미군 병사에 의한 사건・사고
(군중들은) “불태워라, 불태워라”를 외쳤죠? (차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저렇게 많은 군중이었으니까요. 그나마 리더가 없었기때문에 (고자 소동이) 바로 진정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가) 더 커졌을지도 모릅니다. 시내를 순찰하는 MP(미군 헌병) 차 뒤에는 경찰관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오키나와 경찰관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건이 발생해도 그냥 현장에 오기만 할 뿐 MP(미군 헌병)가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방법으로 사건이 처리된 것입니다. 우리 상가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때는 경찰관이 (영어를 할 줄 아는) 호스티스에게 “미국 측에서 뭐라고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오키나와 경찰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것이죠. 그 상황에 다들 답답해 했습니다. 그 외국인은 나쁜 짓을 했는데 경찰관은 영어를 못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다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건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복귀 전의 파업
복귀 전에는 전오키나와군 노동조합과 오키나와 교직원조합, 버스 노동조합 등은 자주 파업을 했습니다. 버스나 교직원이 파업을 하면 학교도휴교했습니다. 전군노조도 해고의 움직임이 있을 때면 자주 파업을 했습니다. 그럴 때는 미군들은 거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했는가 하면 전군노조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활동했습니다. 상가에서는 밤 12시에 가게 문을 닫고각 가게에서 한 명씩 모였습니다. 영화관 안에 모이면 거기에 지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군노조와 싸워야 한다" “그들을 몰아내고 외국인을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전군노조와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의) 오키나와시 육상경기장에 갔더니 50명정도의 사람들이 거기서 전군노조와 싸우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참여해야 했습니다. 조합의 젊은 사람들도 해야 한다고 해서 거기에 참여도 했습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복직 전에도 그런 일도 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
무엇보다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미군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의 그 기쁜 모습(파병이 결정되어) 가게에서 나갈 때의 그 슬픈 표정을 나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쟁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것을 강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죽었습니다. 그 후에도 오키나와 사람들은 별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음식점을 하고 있었는데 미국인 덕분에 오키나와의 식문화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풍요로워졌다고생각합니다. 고등판무관이라는 높은 사람도 있었고 그로 인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싫은 일도 겪었지만 하지만 좋은 일도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로를 포장하고 다리를 건설해 주고 여러 가지를 했지만 그런 일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