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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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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전후 이시카와에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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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관련 연표

1945
사이판 수용소 내에서 출생.
1955
이시카와시에 거주하는 유아가 희생된 ‘유미코짱 사건’ 발생.
1959
6월 30일, 미야모리초등학교에 미군 제트기 추락.
1964
류큐정부립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 소재 전문학교에서 전기에 대하여 공부하다.
1970
12월 20일, 고자 소동 현장을 목격하다.
1971
이시카와시(현 우루마시)에 ‘히노데전기’ 창업.
1972
오키나와 시정권이 일본에 반환되다(일본 복귀).
1990
이시카와시의회 의원을 맡다(3기: 2002년까지).
1992
이시카와시장 선거에 당선되어 시장을 맡다(~2005년 합병 전까지).
2005
2시 2정 합병으로 우루마시 탄생(4월 1일).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이시카와시(현 우루마시) 히가시온나 지역에서 유소년기를 보냈으며, 전파상을 운영하며 동시에 이시카와시의회 의원, 이시카와청년회의소 이사장 등을 거쳐 이시카와시장을 역임하였다. 전후 이시카와시의 상황, 미군기지 소재지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 도시의 변천을 지켜보았으며, 지역의 다양한 활동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미야모리초등학교 미군기 추락 사건과 고자 소동 등의 현장도 직접 목격하였다.

전후 이시카와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

전후의 이시카와시장의 활기찬 모습

이시카와는 매우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무렵 이시카와의 시장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어머니와 함께 이시카와까지 장을 보러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시장은 사람끼리 부딪힐 정도로 붐볐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학교의 학습 환경

유치원은 양철지붕에 창문을 활짝 열어둔 상태였습니다. 비가 오면 흙바닥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건물은 미군이 매각한 건물로 콘세트 헛(Quonset hut) 학교 건물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발을 올려 젖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2살 아래 여동생의 학년은 베이비붐 세대로 10학급 정도 있었습니다. 나는 1945년생인데 1947, 1948, 1949년생은 베이비붐 세대로 10학급 정도 있었습니다. 

미군기지가 있는

그 주변도 미군기지였습니다. “흑인부대”로 불렸습니다. 당시 이시카와 지역에는 이시카와 해변이 있었기 때문에 리조트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미하라 지구의 산 쪽에 나이키(미사일) 기지가 있었습니다. 히가시온나 지구 쪽에도 현재 산에이(히가시온나점)가 있는 뒤쪽에는 미군기지가 있었고저녁에는 훈련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사일이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실제로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발사대가 열리고 미사일이 나왔지만 발사되지는 않았습니다. 소난지역 쪽은 우리가 물놀이를 하러 갈 때 야마시로를 지나가다 보면 왼쪽에 기지가 있었고 미군의 오키나와인 경비병이 서 있었습니다. 미군들이 실탄사격을 하고 있는 것을 기지 근처인 야마시로 입구에서 자주 보았습니다. 소난 쪽은 미군기지라 못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중학교부터는 이시카와 지역 학교를 다니는데 초등학교 때는 근처에 미군 야구장이 있었습니다. 선배들이 거기서 미군과 함께야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 근처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야구 경기를 자주 보곤 했습니다. 미국인에게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말하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영어는 몰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라는 말을 하면 미국인으로부터무언가를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부근의 6번 도로는 예전에는 “군용도로”로 불렸습니다. 그 주변을 자주 미군 탱크가 지나가고 미군이행군을 했습니다. 아직 인도도 없던 시절이라 마을 안에서 미군이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미군이 무섭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컸습니다. 

기지 주변이나 민간 지역에서도 미군이 훈련을 하는데 나는 안 했지만 우마쿠(장난꾸러기) 아이들은 미군의 먹다 남은 음식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미군의 식량에는 “레이션 세트”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안에 커피와 밀크크래커가 들어 있었습니다. 우마쿠들은 그것을 훔치거나 주워서 “전투에서 전과를 거두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미군에게서 훔친다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을 영웅처럼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른들도 그랬습니다. 이런 기억도 있습니다. 

지역의 생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실제로 수류탄을 보여주면서 "이걸 발견하면 건드리지 말고 바로 선생님께 신고하라"고 아침 조회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댜. 당시에는 체육관이 없어서 아침 조회는 밖에서 했습니다. 실제로 그 수류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돌렸습니다. 당연히 내용물(폭발물)은 들어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주의를 몇 번 받았습니다. 또 당시에는 실제로 수류탄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수류탄은 바다에서 물고기를잡는 데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폭발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내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누군가가 수류탄을 바다에 던졌는데 아내의 오빠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살아났지만 옆에 있던 사람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도 들었고 실제로 그런 사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산에는 화약이 많이 있었습니다. 화약을 모아서 선배들이 6근 깡통에 담아 화약을 땅에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쉭쉭쉭쉭쉭”하는 소리가 나면서 다들 폭발하기를 기대했지만 폭발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놀이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모습을 구경했을 뿐이었지만 당시 화약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인골도 가마(자연 동굴) 등에 꽤 많이 있었습니다. 옛날 무덤의 인골은 아니었을것입니다. 

미야모리 초등학교 미군기 추락사건

미야모리 초등학교에서 미군기 추락사고를 목격하다

당시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마침 체육 시간이었습니다. 체육관이 없어서 운동장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습니다. 미군 비행기를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체육이 끝나고 막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체육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미군기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트기가 불에 휩싸여서 비정상적인 상태였습니다. 잠시 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기둥도 보였습니다. 우리는 학교 건물 2층에 충돌한 줄 알고 다들 달려갔지만 추락한 곳은 미야모리초등학교였습니다. 우리는 추락 직후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시체가 있었습니다. 그 현장을 보고 충격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군 기지 주변 사람들의 삶

미군기지와 사람들의 생활

전후에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일은 목수나 모터풀(군용차 집결지) 등에서일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일한다고 하면 그런 일이나그리고 가정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이모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지만 미군에 고용되어가끔 잔디를 깎으러 가곤 했습니다. 내 누나도 풀을 베러 갔습니다. 그것이 상당한 수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집도 그랬지만 미국인이 집의 일부를 빌려 살았습니다. 우리 집은 좁은 집이었는데 옛날 집은 작았지만 우리는 부엌과 약간의 공간만 쓰고 집 안의 좋은 방을 미국인에게빌려주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미국인에게는 현지처 같은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비슷한 집이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그렇게 방을 빌려주고 월세를 받았을 것입니다. 미국인에게 방을 빌려주는 집이 흔했습니다. 미국인과 사귀는 여성들은 “허니”라고 불렀습니다. 커플을 보면 “허니구와”라고 했습니다. 

미국 제품을 얻다

메이드 등 미국인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은 과자를 얻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고 홈(귀국)”이라고 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의 근무를 마치면 모두 돌아가는데 각자가 다음 근무지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옷이나 식기류, 음식 등을 메이드 등에게 주고 갔습니다. 우리도 이사를 할 때는 그렇게 하지요. 그 중 가장 귀중한 물건은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내가 TV를 처음 본 것은 친척이 미국인 가정에서 일했었는데 주인이 고홈 할 때텔레비전을 받았습니다. 모두 그 친척 집에 모여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오키나와에서 TV 방송이 시작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 당시에는 미군 방송만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흑백 텔레비전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미군기지에서일하는 사람들

기지 내에서 보이나 바텐더로 많은 선배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리사 등으로 일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공적이 인정되면 그 사람의 이름을붙여줍니다. 예를 들어 “구다카 하우스”, 제가 알고 있는 구다카씨라는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가데나 기지의 요리사였는데, 장교 클럽에 “구다카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내가 시장이었을 때 그곳에 초대받았습니다. 가데나 기념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거리의 이름 등도 그렇습니다. 이에지마 사람인데 고우치씨라는 미국인에게 입양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지미라는 이름을 딴 “지미 스트리트”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케네디 거리”나 “케네디 공항”과 같이. 

미군기지 주변 사람들의 생활

당시 흑인 부대가 있었는데 병사들은 밤에 술을 마시다가 술에 취해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들은 젊고 점령하려는 마음도 있는지 여자들을 찾으러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 난다”고 자치회에서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자경단”을 조직했습니다. 자치회장이 “외국인(미군)에게는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손을 대면 MP(미군 헌병)에게 끌려가 큰일 난다"고 말했습니다. 청년회 자경단 순찰은 매일 했습니다. 

우리 집도 아버지가 건강했을 때는 미군을 상대로 세탁소를 운영했었습니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미군의 군복 등을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전기다리미도 없던 시절이라 숯다리미를 사용했습니다. 옷을 도난당해 변상해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남의 집을 빌려 미군기지 게이트 앞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데 음식 장사는 일반인 대상과는 달랐습니다. 그곳은 이시카와의 시가지였고, 이 근처에는 A사인은 없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의 미군의 존재

미군기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느끼는 것은 없었습니다. 미군의 행군이나 탱크가 지나가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탱크는 군용도로에 궤도 자국을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지금 같으면 굴착기 등은 트레일러에 싣고 다니지만 당시 탱크나 미군 차량은 당당하게 다녔습니다. 국도 등의 도로도 모두 똑같이 이용되었습니다. 

고자 소동의 배경에 있는 것

미군 관련 사건・사고“고자 소동”에 대해

미군 관련 사고나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택시 운전기사의 피해나 기지 내에서 미국인에게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 등 많이 있었습니다. 유미코짱 사건(1955년) 등도 있었습니다.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재판 등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고 피고인이 미국으로 귀국하면 자세한 내용을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울분이 쌓여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지나 미군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자 소동”이 1970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때는 나는 고자 안에 있는 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지 않는 상태였다면 나도 참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날은 친구와 고자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미국인이 쫓겨서 도망가는 것을목격했습니다. 게이트 거리로 나가보니 차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차인 줄 모르고 축제 횃불을 태우는 줄 알았습니다. “축제를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신문을 보고 그것이 고자 소동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반환운동의 상징

일본 복귀라는 것이 큰 획을 그었지만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일이 바빠서 PTA 활동도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있었지만 복귀 전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일장기를 팔았습니다. 복귀 운동의 상징은 일장기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일장기를 들고 “교가댄스”를추고 남녀 함께 전교생이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어느새 "일장기 반대"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놀라웠습니다. 복학 후 나는 PTA 임원도 했지만 입학식 때 "일장기 반대"라고 말하면서 일부 선생님들과 일장기 게양을 저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일장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모순을 느끼면서왜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일장기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 중에는 당연히 일장기를 들고 진군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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