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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OR OKIN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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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inawa1945

기자가 바라본 “오키나와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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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관련 연표

1940
이시가키시에서 출생.
1955
야에야마고등학교에 입학, 문예부 입부.
1959
메이지대학교 법학부에 입학, 대학 내의 평론 잡지 동아리 「스루가다이 논조」에 입부. 친구의 권유로 오키나와의 학생들이 만드는 동인지 『세이란』에도 참가.
1960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로 「스루가다이 논조」부의 부원들과 국회 데모에 참가.
1962
메이지대학교 법학부 사회사상 세미나에 소속. 세미나 동기 몇명과 함께 오키나와에서 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 『오키나와 전후세대의 사회 의식』을 정리.
1963
메이지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 학사 편입. 4월 28일, 오키나와 본섬 북부 헤도곶과 요론섬 사이에 있는 북위 27도 선상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해상집회를 취재.
1965
메이지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 4월 류큐신보에 입사하여 도쿄총국보도부에 배속.
1968
외무성 기자클럽(카스미클럽)에 가입, 처음으로 전속 담당이 되다. 취재 수첩을 바탕으로 매주 일요일에 관계자의 이야기를 원고지에 옮겨 쓰다.
1972
5월 15일,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일본 무도관에서의 기념식전을 취재.
2000
당시의 취재 노트와 원고 등을 바탕으로 『다큐 오키나와 반환 협상』을 출판.

STORY증언

증언자 약력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를 위한 미일 반환 협상이 본격화된 1968~69년 류큐신보 도쿄지사 기자로서 미일 협상의 모습을 취재했다. 류큐신보사에서는 많은 사업에 종사하며 동사 편집국 정차경제부장, 이사 편집국장을 거쳐 상무이사, 이사 부사장등을 역임. 오키나와 민중사와 문화 관련 서적도 다수 집필하고 있다.

전후의 야에야마와 고교 생활

전후 야에야마의 풍경

야에야마에는 미군 기지가 없었습니다. 야에야마의 민정부 행정관으로 미군 수장이 있었습니다. 이시가키섬 서쪽에 민정관부라는 관사가 있었는데그곳에는 철망이 처져 있고잔디밭과 하얗게 페인트칠을 한 집이 있었습니다. 미국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습니다. 

야에야마 고등학교 문예부로

문예부에 들어가게 된 것은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지만실제로는같이 모여서 독서회를 하거나감상회를 했습니다. 문예부는 1년에 한 번『학도』라는 교내 잡지를 발행했습니다. 

학교에서 개최된 항의집회

오키나와 본섬에서 군용지 수용이 시작되었다는 뉴스를 듣고야에야마에는 미군기지가 없었지만 불안했습니다. 학교와 학생회가 함께강당에서 군용지문제에 관한 집회를 열었습니다. 군용지 수용의 배경과 그 문제점을선생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학생회장을 비롯해변론부가 격문을 띄웠습니다. 

류베이문화회관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나는 정치적인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문예파, 문학파로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1958년에야에야마 고등학교 근처에야에야마 류베이문화회관이 생겼습니다. 류베이문화회관은 오키나와 본섬과 미야코, 아마미를 포함해 4~5개 회관이 생겼고그 중에 야에야마도 포함됐습니다. 미국 사회교육 시설로 첨단 문화시설이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라 불렸습니다. 나는 그 시설에 자주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어려운 책을 읽는다기보다는『LIFE』나 『TIME』 같은 미국의 그래프 잡지를보는 것이 즐거워서 다녔습니다. “미국은 대단한 문명국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회관은 미국의 선전기관이기 때문에미국 민주주의를 선전하는 책도 있었고나도 그런 책을 읽고미국 민주주의의 훌륭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뇌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인 미국이 오키나와에서 하고 있는 일이”"미국의 건국 정신이나 헌법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대학 입학 후"미국의 건국정신과 오키나와"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야에야마 마이니치신문에 실렸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하고 있지만지금 미국이 오키나와에서 행하고 있는 군용지 수용이나각종 사건 사고, 부녀자 폭행 등의인종차별은 미국 건국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그건국정신에 반하는 행위를 오키나와에서 하고 있는 것이현실이라고 썼습니다. 

도쿄의 대학에서 오키나와를 생각한다

도쿄의 대학에서 오키나와의 관점으로 생각하다

나는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하고『스루가다이 논조』라는 잡지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법학부 학생이었지만잡지 발행 등을 했습니다. 안보투쟁을 하던시절이라 대학 자체가 파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업 중에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동아리 방에 모여 매일 국회에 데모하러 갔습니다. 『스루가다이 논조』에 에세이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안보투쟁 시위를 하면서도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안보투쟁에서 “일본의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 묻는다”고 하지만. 오키나와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는 "한 청년의 조국에 대한 불신"이라는제목의 글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시각에서 안보투쟁을 볼 때처음에는 학생들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오키나와에 대한 관심은 낮았습니다. 

당시 나는 아르바이트로 초등학생 과외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지도를 보다가 오키나와 이야기가 나왔는데그 학생이 "이런 곳에도 일본인이 있는건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야마노쿠치 바쿠의 시에 나오는 말마따나“눈앞의 일본인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왜 아이들은 오키나와에 대해잘 모르는지”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고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으니"“그럴 만도 하다”고 그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전후 세대의 의식 조사 실시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오키나와에 조사하러 갔습니다. 나는 사회사상사 세미나에 소속했는데철학의 나카무라 유지로 선생님이 주임교수였습니다. 세미나 동료 5~6명과 함께오키나와 조사에 나섰습니다. 오키나와의 전후세대 젊은 세대의 의식 조사를 했습니다. 각 학교에서 1,000여명에게 설문지를배부하여 조사했습니다. 통계를 내고 조사 결과를 분석하고 정리하여 대학 시절에 정리한 『오키나와 전후 세대의 사회 의식』 『오키나와 전후세대의 사회 의식』이라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설문지를 작성하는 단계에서 오키나와의 역사를 공부하고오키나와의 현황과 기지의 현황을 조사하여동료들과오키나와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 자료센터가 국회 근처에 있었습니다.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요시오 선생님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이 시설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시설 이용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고서를 드렸더니나카노 선생님은 그 내용에 매우 흥미를 가지셨고잡지 『세계』와 기타 여러 평론 잡지에종종 그 보고서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여오키나와의 의식과 아이들의 의식에 대해 쓰셨고오키나와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이 조사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다

1959년에 매우 감명 깊게 읽은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쿠바 혁명을 일으킨 피델 카스트로의 『나의 쿠바 혁명』입니다. 쿠바는 오키나와와 같은 사탕수수 섬이며자결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독재자가 존재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카스트로가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해신선한 놀라움과 충격을받았습니다. 

또 한 권은 가정학의 미조우에 야스코 선생님의 저서입니다. 시마네대학의 교수였지만 류큐대학에 초빙을 받아가정학 단기강습을 위해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오키나와에 머무는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시마네에 돌아가 『수난의 섬 사람들』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훌륭한 다큐멘터리로학생 때 읽고매우 감격했습니다. 그 책 속에 류큐대학 가정학과의 현황에 대해비판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리 류큐대학 가정학과가미국식 재료와 기구를 사용하여 맛있는 요리를 만든다고 해도오키나와의 류큐대학과서민의 생활은 관계가 없고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저 대학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다가정학과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그런 내용이 세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법을 공부하고 있는가”자신을 돌아보며스스로에게 묻었습니다. 내가 공부한 것을 어떤 형태로든 오키나와에 돌려줘야 한다그렇게 생각하고 펜을 들고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신문기자가 된 것은 그 책이 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출신 학생들

같은 오키나와 출신이라 해도 당시 학생들의 생각은 다양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고그 친구를 중심으로 동인지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잡지는 정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참가하는 학생들의 형편이 괜찮아서 그랬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겁도 없이 그 동인지 잡지에 대해“이래서야 되겠느냐? ”며『세이란 (동인지 이름)』을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미조우에 선생님이 그의 저서에서 지적한 것처럼오키나와와의 관계, 자신들의 입장을 재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키나와 연구에 대해 “오키나와학”이라는 말이 그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오키나와학과 관련해 "신오키나와학의 권장"이라는 제목으로  『세이란』에 글을 올려“오키나와학과 현실 사회를 개혁해야 하며”"그러기 위한 힘이 될 수 있는 오키나와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63년에 아프리카 모시에서 유엔 인권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오키나와에서의 미국 통치는 유엔의 인권에 위배된다는 결의가 채택됐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에 대해 여러 시각이 있지만나는일본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복귀돼야 한다는 것보다는오키나와의 현재 인권 상황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고이를 위해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가 도움이 됐으면 하고“복귀는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권위원회의 결의와 같은 국제적인 확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1963년에 헤도곶과 요론섬 사이에 있는 북위 27도선 부근에서처음으로 열린 해상집회에 참가했습니다. . 

신문 기자로서 제일선에서 취재

류큐신보사 도쿄 지국 근무

오키나와의 신문사에서 자신의 경험을 살리고 싶다고생각했습니다. 류큐신보사와 오키나와타임즈사는 도쿄에 지국을 두고 있었는데류큐신문사의 채용시험이 처음으로 본토에서 실시되어내가 채용되었습니다. 

처음엔 여기 저기 다 돌아다니면서오키나와 현민회에도 갔었습니다. 정부의 오키나와 담당 관청인 “오키나와 특별지역 연락국”이총리부 안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3개 과가 있었는데야마노 유키요시씨라는 시마네현 출신의 재미있는 분이 국장이었습니다. 총리부 안에도 기자클럽이 있었고처음에는 그곳을 거점으로 취재를 했습니다. 그리고 총리부 근처에남방동포를 지원하는 특수법인 남방동포원호회(훗날 오키나와협회)가 있었습니다. 와세다대학 총장을 지낸 오하마 노부모토씨가 회장이었으며사무국장은 종전까지 오키나와의 관공서에 있던 요시다 시엔씨였습니다. 각 당에는 오키나와 특별위원회가있었고거기에 있는 정당 관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다른 취재처로는대중운동을 하는 오키나와 관련 단체나오키나와 현민회그리고 류큐 정부의 파견 기관인 류큐 정부 도쿄사무소거기에는 대외협력관이 3~4명 있었고각 부처와의 교섭을 하고 있었는데그런 곳을 중심으로 취재했습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가 가까워지자 각 부처의 대응을 취재했습니다. 각 부처에 오키나와 대책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요컨대오키나와 복귀에 즈음해 제도를 연결하는 데 무엇이 문제가 되고무엇이 필요한지를 검토하기 위해각 부처에 복귀 대책실을 두었습니다. 그곳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도쿄 지국은 인원이 적어처음부터 자립적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복귀가 가까워지자 각 대학과 학회에서도 오키나와 조사를 했습니다. 일본민족학회, 일본음악학회 등 아홉 학회가 있었는데그 아홉 개 학회가 연합한 구학연합회가오키나와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문화와 관련해 관심 많았던 나는 그것을 담당했습니다. 

지방지로서는 이례적으로 오키나와 반환 협상을 취재

오키나와 반환 협상이 본격화되고당시 카스미클럽이라고 불리던 외무성 기자클럽은대형 신문사나 방송국으로 조직되어 있었고류큐신보와 같은 지방지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지방지들도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지방신문은 교도통신사로부터 기사를 전달받고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현민의 운명이 결정되는 반환 협상을오키나와의 신문사가 취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는당시 카스미클럽의 간사였던 요미우리신문 사람을 만나취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때부터 외무성의 반환 협상을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외무대신도 오키나와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나의 발언에도 매우 관심을 보였습니다. 오키나와 반환에 있어 핵을 뺄 것인가, 핵을 포함할 것인가에대해당시 주미대사였던 시모다씨가 귀국해도쿄에 돌아올 때마다“핵을 포함하지 않으면 미국은 합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에""오키나와에 핵이 있는 상태로 반환되면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나는 미키 외무상에게 말했습니다. ""폭동이라니, 심상치 않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1970년에 폭동(고자폭동)이 일어났지요. 그래서인지오키나와 출신 기자에 대해 관심은 가졌던 것 같습니다. 미키 외무상은 핵에 대해 본토와 같은 기준의 반환을 원한다고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속셈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반환 협상의 방침은 거듭 백지상태라고 하면서“핵을 포함하는 반환은 안 된다”라는 여론을 조성해결국 반환이 되었지만반환됐다고 해도실제로는 여러 가지 허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형식적으로 미일안보조약을 적용한다고 하는 것으로미군기지 정리 축소나지위협정의 개정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형식론으로 본토와 같은 기준으로의 반환일 뿐말하자면 눈가림식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

일선에서 취재

역시 오키나와에 전달해야 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 말고도제대로 취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재 중 외무성의 문턱이 높게느껴져좀처럼 진심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관공서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외교 문제가 얽혀 있어서 그랬겠지만취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신의 취재 기록을 정리하다

자신의 취재 기록을정리하다본사에 보낼 수 있는 취재기사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더 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보낼 수 없었습니다. 1968~69년에 걸쳐오키나와 반환이 공식적으로 결정된 시기의 협상은역사적 의미가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취재하고 노트에 기록해 둔그 정보에 대해 알고있는 오키나와 현민은나뿐일지도 모르니이것은 향후를 위해서도신문에 실리지 않았다고 해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첩은 이 정도로 작고 당시 사용하던 수첩그것을 바탕으로 매주 일요일에한 주간의 취재를 원고지에 옮겨 적었습니다. 협상한 사람이나 내용을가능한 한요점만이라도 기록하려고일기처럼 계속해 썼습니다. 그 기록은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가 실현되어 나도 도쿄에서 나하로 돌아왔고일기에 대해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류큐대학의 국제정치 연구자인 가베 마사아키씨가 찾아와오키나와 반환 협상에 대한 연구를 한다고 하기에취재 노트를 참고 자료로그에게 빌려주었더니그는 한 차례 읽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것은 책으로 만들어 많은 연구자들에게 읽게 해야 한다"고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큐오키나와 반환 협상』이라는 책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취재내용을 기록한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출판하게 되었지만기록으로 남아지게 됐으니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스트란?

저널리스트란?

저널리스트는 억압받는 사람이나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 힘이 되어 주는숙명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사를 쓸 때도그런 사람들을 대변하고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는그런 생각이 바탕이 돼야 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저널리스트는 가져야 합니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중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자신에게 물으면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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